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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돌출된 것은 1788년(정조 12)입니다. 시파는 정조의 탕평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정국을 주도하여 나갔는데, 이에 반발하는 벽파가 이들을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고 비판하면서 ‘시파(時派)’ 혹은 ‘시배(時輩)’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또 그에 비해 자신들은 궁벽하게 의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스스로 ‘벽파(僻派)’라고 하였습니다.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임오화변(壬午禍變)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792년(정조 16) 영남 만인소(嶺南萬人疏) 사건에서 충돌하였습니다. 영남의 유생들이 사도세자의 죄를 신원하고 사도세자에게 죄를 씌운 무리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하였습니다. 이때 시파는 사도세자 신원을 통해 정조의 권위를 높이는 데 동의하는 입장이었고, 벽파는 영조가 정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