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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때 벽파와 시파 등으로 나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선은 왜 이렇게 많은 파가 나뉘게 되는지 궁금하고 특히 정조때 벽파와 시파 등으로 나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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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영화 전문가
    유영화 전문가
    남성학원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돌출된 것은 1788년(정조 12)입니다. 시파는 정조의 탕평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정국을 주도하여 나갔는데, 이에 반발하는 벽파가 이들을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고 비판하면서 ‘시파(時派)’ 혹은 ‘시배(時輩)’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또 그에 비해 자신들은 궁벽하게 의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스스로 ‘벽파(僻派)’라고 하였습니다.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임오화변(壬午禍變)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792년(정조 16) 영남 만인소(嶺南萬人疏) 사건에서 충돌하였습니다. 영남의 유생들이 사도세자의 죄를 신원하고 사도세자에게 죄를 씌운 무리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하였습니다. 이때 시파는 사도세자 신원을 통해 정조의 권위를 높이는 데 동의하는 입장이었고, 벽파는 영조가 정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의 당쟁사에서 사도세자 문제를

    두고 나뉜 시파와 벽파의 투쟁은,

    다른 당파싸움과 마찬가지로 이후 조선왕조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파(時派)란 조선 후기 사도세자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붕당 대립에서 사도세자를

    동정하고 그 아들인 정조의 정책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벽로 벽파(僻派)와 대칭되는 의미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파와 벽파는 조선 영조 때 장헌세자의 폐위와 사사를 둘러싸고 분열된 파당입니다. 무고를 받아 뒤주 속에서 굶어죽은 세자를 동정하는 입장이었던 시파는 남인들이었고 세자를 공격해 자신들의 무고를 합리화하려 했던 벽파는 노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