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빈공과는 어떤 시험이었나요?
신라와 발해가 빈공과의 석차와 서열을 두고 다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당나라의 빈공과는 어떤 시험이었길래, 신라와 발해가 경쟁을 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대에 이르러 중국은 이전까지의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서역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벌리고 이전부터 관계를 맺어왔던 동북, 동남아시아 지역 국가와의 교류의 폭도 더욱 넓혀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 내부에서는 내·외국인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인재를 뽑자는 분위기가 높아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 치러지게 된 것이며 빈공과라고 불린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빈공과는
간단히 말하자면 외국인 전형입니다
당나라 과거 시험은 수도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상공(上貢), 지방민을 위한 향공(鄕貢), 그리고 외국인 대상의 빈공(賓貢)으로 나뉘었구요
이 세가지 소과중 하나에 합격해야 본 시험인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신라와 발해에는 과거제도가 없었고
특히 신라는 엄청 꽉 막힌 신분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낮은 신분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빈공과에 합격하는 것이
신분의 벽을 뚫는 몇 안되는 방법이었습니다
빈공과 합격자는 결국 외국인이라 관직을 받을 순 없지만 운이 좋으면 작위를 받을 순 있었으며
빈공과 합격은 현대로 비유하자면 하버드대 합격증 같은 것이라
엄청난 스펙으로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빈공과는 당나라의 과거 제도로 외국인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 관리로 선발하는 제도였습니다.
당나라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도 관직을 개방할 정도로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빈공과에 발해와 신라 사람들이 시험을 치러 문화적 우월 경쟁을 했습니다.
8세기 초 당과 발해는 발해의 장문휴가 산둥 반도를 공격하는 등 대립적이었으나 9세기 빈공과에 발해인이 시험을 치르고 당의 3성 6부를 모방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로 개선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나라에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당조정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과거 제도인 빈공과를 시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