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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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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18대 왕인 현종치세 때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조선 18대 왕인 현종은 드라마나 영화로 많이 안다뤄진것 같습니다.

저한테는 익숙하지 않은 왕인데 당시에는 무슨일이 있었나요?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Slow but steady
      Slow but steady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기해복제 문제라는 예론에 부딪혔다고 합니다. 즉, 효종의 상을 당하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문제가 정쟁으로 번진 것이다. 당시 일반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을 따랐다고 합니. 그러나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정된 『오례의(五禮儀)』를 따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고 하지요.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서 왕위에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책립되었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의 예로 3년상의 상복을 이미 입[服]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해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즉위 초 부터 문제가 업첨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재위기간중 양란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의 지배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효종이 추진해오던 명분론적 북벌론은 중단했으나 군비강화에 힘써 1665년(현종 6년) 통제영(統制營)에서불랑기(佛狼機) 50정, 정찰자포 200문을 만들어 강화도에 배치했으며, 1669년(현종 10년)에는 어영병제(御營兵制)에 의한 훈련별대(訓練別隊)를 창설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종(685~762)

      본명 이융기(李隆基). 예종(睿宗)의 제3자. 명황(明皇)이라고도 한다. 조모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낙양에서 태어났으며, 9세에 임치왕(臨淄王)으로 봉해졌다. 26세 때 위후(韋后)가 딸 안락공주(安樂公主)와 짜고 중종(中宗:현종의 백부)을 암살, 중종의 아들 온왕(溫王)을 제위(帝位)에 앉히고 정권을 농단(壟斷)하기 위해 현종 아버지 상왕(相王)까지도 해치려 하였다.

      그는 심복 장병을 인솔, 위후와 안락공주 일당을 친 뒤 아버지를 제위에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고, 28세에 마침내 아버지의 양위로 즉위하였다. 당시 권세를 누린 태평공주(太平公主) 일파를 타도하여, 측천무후 이래 반 세기에 걸친 부인의 정권 개입을 근절시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현종의 치세는 요숭(姚崇) ·송경(宋璟) ·장열(張說) ·장구령(張九齡) 등 명상의 도움을 얻어,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조운(漕運) 개량과 둔전(屯田) 개발 등으로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동돌궐(東突厥) ·토번(吐蕃) ·거란(契丹) 등의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개원(開元) ·천보(天寶) 시대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자 정치를 등한히 하고, 도교(道敎)에 빠져 막대한 국비를 소비하였으며, 35세나 연하인 양귀비(楊貴妃)를 궁내로 끌어들인 뒤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여 권신 이임보(李林甫)가 국정을 대신 맡아보았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쓰촨[四川]으로 난을 피해 가던 도중에 양귀비는 병사에게 살해되고, 이듬해 아들 숙종(肅宗)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은거하였으며, 장안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그는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음악에 뛰어나 스스로 작곡까지 하고, 이원(梨園)의 자제 남녀를 양성하였다. 서도에도 능하여 명필이라는 칭호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