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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검은꼬리153
화사한검은꼬리15323.07.04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일으킨 정치적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중국 역사를 보면 진시황을 폭군이라고 표현하고

진나라를 멸망으로 몰고가는 악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건에 분서갱유도

포함되어 있다고 배웠거든요

진시황에 입장에서 분서갱유 같은 악행을 저지른 이유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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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분서(焚書)'는 책을 불사른다는 뜻이고, '갱유(坑儒)'는 유생을 구덩이에 산 채로 파묻는다는 뜻이다. 《사기》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사건에서 비롯된 말로, 학문과 사상에 대한 탄압을 상징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박사(博士) 70명과 함께 함양궁(咸陽宮)에서 주연을 벌였다. 이때 제나라 출신인 순우월(淳于越)이 군현제(郡縣制)에 반대하며 은(殷)ㆍ주(周) 시대의 봉건제(封建制)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승상(丞相)인 이사(李斯)는 이를 비판하며,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사로운 학문으로 도당을 이루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건의로 '협서율(挟書律)'이 제정되어 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종수(種樹) 등의 분야를 제외한 시서(詩書)ㆍ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은 박사관(博士官)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군수(郡守)와 군위(郡尉)가 수거해 모두 불사르게 했다. 명령을 받고 30일이 지나도 태우지 않으면 묵형(墨刑)과 성을 쌓는 일에 징발하는 형벌을 주게 했으며, 무리를 지어 시서를 논하면 처형한 뒤에 시신을 길거리에 버리는 기시(棄市)의 형벌을 주게 했다.


    분서가 실제로 얼마나 엄격히 시행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협서율은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유지되었으며, 혜제(惠帝) 때인 기원전 191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때 유가의 육경(六經) 가운데 하나이던 《악경(樂經)》이 산실되어 오경(五經)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불사의 선약(仙藥)을 얻기 위해 후하게 대우하던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라는 방술사(方術士)들이 자신을 비난하며 도망치자, 어사(御史)를 시켜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들을 조사해 자신을 비판하는 자를 찾아내게 했다. 그리고 유생들이 서로 고발하여 금지를 어긴 460여 명을 찾아내자, 그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모두 죽이고 그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맏아들인 부소(扶蘇)가 유생들을 지나치게 탄압해 민심이 불안해질 것이 우려된다고 간언했으나, 진시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몽염(蒙恬)이 주둔하고 있던 상군(上郡)으로 내쫓았다.

    출처 :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시황은 이사와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을 천하통일 한 제왕이었습니다. 법가사상(법치와 패도정치)은 법률과 술수를 통한 다스림을 강조하였기에 자기노선에 역행하는 유교사상(덕치와 왕도정치)에 적대적이었습니다. 분서갱유는 농서(농사책)와 복서(점을 보는 책) 등을 제외한유교경전을 불사르고 460여명의 유학자들을 산채로 생매장한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