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 전투는 영토를 더 차지하기 위한 전투였나요?
영화 소재로도 사용됐던 백마고지 전투는 전쟁의 막바지에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벌였던 전투였나요? 그 땅이 그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했던건지 궁금하고, 그로인한 희생자들은 어느 정도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으로 회담이 난항을 겪고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 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했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입니다.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으로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km전방에있는 봉해로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키고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하게 됩니다.
중공군은 고지 주붕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나 며칠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 28, 제30 양 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습니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가나 12일 아침 반격 제 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함으로 이를 재탈환,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됩니다. 이에 제 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고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라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함으로 적을 완전히 격퇴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 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 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일간 12차례 쟁탈전을 반복해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해 확보했고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 38군은 총 9대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했는데 그 중 1만여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것으로 집계되었고 국군 제 9사단도 총 35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고 보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