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만든 통일벼는 어떻게 만들어 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통일벼는 어떻게 만들어 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통일벼를 만들게 된 배경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고 현재에도 재배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준 과학전문가입니다. 통일벼는 남북한의 농업과학자들이 공동으로 개발한 벼 품종입니다. 이 벼는 한반도의 다양한 기후 조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통일벼 개발의 배경은 남북한의 농업 환경과 기후 조건에 적합한 벼 품종을 만들어, 한반도 전체에서 농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농민들의 소득을 증대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또한 남북한의 농업 협력을 촉진하고, 향후 통일에 대비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통일벼 개발은 남북한의 농업과학자들이 서로의 벼 품종을 교배하여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재배 환경과 기후에 따라 다르게 품종을 선택하고, 이를 교배하여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냈습니다.
현재로서는 통일벼의 재배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남북한의 정치적 상황과 농업 정책, 그리고 농민들의 선택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통일벼는 한반도의 통일을 상징하며, 남북한의 농업 협력과 기술 교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추가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질문해주세요.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안녕하세요. 류경범 과학전문가입니다.
통일벼는 한국의 농학자 허문회 교수가 개발한 쌀 품종입니다.
허문회 교수는 IR8이라는 품종의 개발에 참여하면서, 2년의 연수 기간 동안 한국에서 재배할 수 있는 IR8을 개발하는 데 열중했고, IR8과 추위에 잘 견디는 일본 홋카이도 품종, 키 작은 대만의 재래 품종 등을 교배해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품종은 한국에서 '통일’이라는 정식 이름을 얻고 1971년부터 농가에 보급되었습니다.
다만 현재는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홍성택 과학전문가입니다.
통일벼는 기존의 벼 품종과 비교하여 수확량이 약 20% 이상 높고, 병해충에 대한 저항성이 강하며, 품질도 우수합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통일벼는 농업 생산성 향상과 식량 안정을 위해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철승 과학전문가입니다.
1960년대 후반 한국은 쌀 부족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1966년 농촌진흥청(현 농림축산식품부)은 벼 생산량 증대를
위해 품종 개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은 국제벼연구소(IRRI)와 협력하여 진행되었습니다.
통일벼 개발 과정은
1972년 IRRI에서 개발한 IR8 품종과 한국 품종 '납작벼'를 교잡하여 '통일벼'를 개발했습니다.
통일벼는 짧은 생육기,
높은 수량, 강한 병충해 저항성 등의 특징을 가진 품종입니다.
1976년에 품종 보급을 시작했으며
1980년대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품종이 되었습니다.
통일벼 개발 주도 인물은
농촌진흥청 벼 육종 팀이며 박종욱, 김용재, 김성환, 이재근 등
국제벼연구소(IRRI): 헨리 빌(Henry Beachell) 박사, 밥 찬드(Bob Chandler) 박사 등
통일벼 개발은 한국의 쌀 생산량 증대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 100kg/10a 수준이었던 벼 생산량은
1980년대 초반에는 300kg/10a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는 한국의 식량 자립도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농업 근대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통일벼 이후에도 한국은 다양한 벼 품종을 개발했습니다.
현재는 찰벼, 멥쌀벼, 기능성 벼 등 다양한
품종이 재배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통일벼는 농촌진흥청과 국제벼연구소의 협력으로 개발되었습니다.
통일벼 개발은 한국의 쌀 생산량 증대와 식량 자립도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통일벼는 한국 벼 품종 개발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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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성학 과학전문가입니다.
통일벼는 허문회 박사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개발한 키작은 다수확 인디카 품종과 북방계 자포니카 품종을 교하 한후 다시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볍씨는 병풍해도 강하고 생산량이 많아 당시 식량증산계획에는 적합한 품종이었으나 동남아 계열의 품종인 인디카 품종에 가까워 쌀맛이 높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밥맛이 좋다고 함으로 인해 주변사람들도 더불어 좋다고 하면서 보급이 시작되었답니다. 그러나 냉해에 약하다는 단점과 쌀맛이 없다는 단점으로 인해 지금은 거의 재배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송종민 과학전문가입니다.
통일벼는 1966년에 개발되어 시험재배를 거쳐 1972년부터 우리나라 전국으로 확대, 보급된 벼 품종의 이름이다.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 초청 연구원이었던 허문회 박사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일본 벼 유카라(YUKARA, 자포니카 품종), 대만 벼 TN1(인디카 품종)과 국제 미작연구소의 IR8의 3원교잡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품종은 국제미작연구소의 667번째 개발 품종이라 하여 IR667이라고도 불리나, 한국에서는 이 품종을 '통일'이라 이름 붙였다. 이 품종은 재배가 까다롭고 미질이 좋지 않아 1992년 이후 농가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뛰어난 생산성으로 70년대 우리나라 식량자급을 이루게 한 녹색혁명의 주역이다.
1964년부터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에 초청연구원으로 파견된 허문회 박사는 한국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 품종과 달리 생산성이 뛰어난 인디카 품종에 관심을 가졌으나, 결론적으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열대지방에서 재배되는 인디카 품종이 온대형 자포니카 품종과 유전적 형질이 매우 달라 한국에서 재배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허문회 박사는 인디카 품종과 자포니카 품종의 원연교잡을 통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원연교잡이 가지는 잡종불임이라는 문제점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세계 최초로 3원교잡에 성공하게 된다.
안녕하세요. 김재훈 과학전문가입니다.
통일벼는 한국의 쌀 품종으로,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한 쌀입니다. 1970년대에 허문회 박사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개발한 IR667이라는 품종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통일벼는 키가 작고 수확량이 많아서 쌀의 자급을 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맛이없고 추위에 약해 현재 통일벼는 재배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통일벼의 후속품종이나 다른 신품종이 널리 재배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설효훈 과학전문가입니다. 1960년대 당시 한국은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식량사정이 나빴다. 지금도 세계적으로는 식량사정이 좋지 못한 나라들이 많은데, 1961년 한국의 GDP는 세계 64위에 불과했다. 하루 세 끼를 먹는다는 걸 저소득층도 아닌 일반 서민조차 상상하지도 못하던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 연유로 박정희 대통령이 식량난 및 식량자급 문제를 해결하라고 농촌진흥청에 지시를 내렸고, 결국 '잘 자라는 쌀을 만들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러 서울대학교의 생물학자 허문회 교수의 주도로 홍성호 연구사, 김광호 연구사, 박순직 연구사 3명의 밤낮 없는 연구와 노동을 통해 인디카종(장립종) 쌀과 자포니카종(단립종) 쌀을 교배해서 새로이 만들어낸 벼 품종이 바로 통일미다.
통일벼는 냉해에 상당히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는데, 1980년 최악의 냉해로 통일벼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1980년은 쌀 생산량이 30% 감소한 역대 최악의 흉년이었다.(어느정도였냐면 한국이 농림부를 세운 1949년 이후 지금까지도 이정도의 생산량이 한꺼번에 감소한 해는 없었다.) 결국 1981년 통일벼 강제 정책이 폐기되었고 식량난이 대강 해결된 1980년대 후반때가 되자 맛이 없어서 통일미는 당연히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쌀 농사는 1977년 풍년 이후 1980년에는 냉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해마다 풍년이 들어 쌀이 남아돌아 쌀 증산이 아닌 감산 요구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1991년을 끝으로 통일미의 정부 수매도 종료되었다. 그리하여 현재는 더 이상 재배되지 않고 있다. 대신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 같은 곳에서 서산벼 등의 이름으로 종자를 따로 보관은 하는 듯하다.식량안보목적의 다수확 품종 자체의 연구는 통일벼를 심지 않게 된 뒤로도 계속됐고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가 되면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주식에서 쌀 비율이 줄어들면서, 쌀 자급은 했는데 식량수입 의존도가 오히려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통일벼 강제정책이 폐기되자 통일벼는 1984년부터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2000년대부터 태국 요리, 베트남 요리 등이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인디카쌀 수요가 조금씩 늘고 있지만, 어차피 의무수입 물량으로 커버 가능한 정도고 통일벼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라 아웃 오브 안중.
출처 : 나무위키 - 통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