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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가오리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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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부터 탈성리학의 경향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이라는 나라는 성리학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17세기 후반부터는 탈성리학적 경향이 대두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성리학의 어떤 모순들이 당시 탈성리학적 경향이 나오게끔 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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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개의 답변이 있어요!
    • amorfati
      amorfati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부에서는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보급과 같은 방법으로 지배체제의 강화를 시도하였으나 향촌사회는 결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 이는 정부의 정책이 사회변동의 가속성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총체적 수치는 증가되었다고 하나 그 혜택의 대부분은 지주들에게 돌아갔을 뿐이고, 부농으로 성장한 자영농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많은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숙종 37년(1711)에는 전라도에서 대량의 유민이 발생하였는데, 무안에서만도 5천호 가운데 2천호가 유민화할 정도였다. 숙종 43년에는 충청도에서 10만 명이 유민이 발생하였고, 경상도에서도 영조 9년(1733)에 약 17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피폐한 향촌사회의 현실에서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지배층은 사회윤리의 보급을 표방하였지만, 그 이면의 목적은 민중에 대한 경제수탈을 효율적으로 해내려는데 있었다. 따라서 정부의 지배체제 강화 시도는 향촌사회 안팎에서 민중의 저항을 불러왔다.


      아울러 성리학은 공리공담과 형식에 치우치는 경향이 심해져 점차 관념화, 사변화되어 갔을 뿐 아니라, 교조주의로 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로지 성리학만을 ‘正學’으로 내세우고 그 나머지는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과 종교도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西學, 즉 天主敎는 물론이고 기존의 佛敎, 道敎, 圖讖을 左道나 邪學·異端 등으로 배격하였을 뿐 아니라, 유교의 일파인 陽明學까지도 이단으로 파악하며 성리학의 유일화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으로 사상의 停滯를 가져왔다.


      이에 성리학의 정체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체계가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변동의 가속화’라는 현실문제와 연결되면서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미 교조화의 경향을 띠고 있던 성리학의 사상체계로는 이러한 여러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실개혁에 필요한 사상체계가 요구되었고, 이것이 곧 ‘實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