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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은 어떻게 일어났나요?

안녕하세요? 프랑스 혁명때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고 알고 있는데 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는지 궁금합니다. 만약에 정부를 공격할려면 베르서유로 갔어야 하는게 아닌가 해서요..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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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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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89년 7월 14일에 일어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탈취한 사건.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된 사건입니다.

    당시 파리 근교에는 루이 16세의 명령으로 국경지대에서 진주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파리 시민들 사이에는 군대가 파리로 진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져나갔다. 이런 가운데 7월 11일, 루이 16세는 재정총감 자크 네케르를 파면했고 이 소식에 파리는 혼란에 빠졌고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고 각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쳤다.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의 요새로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고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1만여명의 시민들은 바스티유로 쳐들어갔고 바스티유 수비군은 15문의 대포를 발포하여 시민 약 100여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제대로 무장한 국민군의 증원과 시민들의 끈질긴 공격으로 결국 바스티유는 함락되고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1789년 7월 14일 평범한 파리 시민들이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 속에 난입한 일일 것이다. 이는 격동과 혼란 속에서 군주제 타도로까지 이어졌고, 자연권과 "자유, 평등, 박애"의 원칙에 의거한 공화정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파산한 군주인 루이 16세가 170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스의 삼부회를 소집한 이후, 일 년간 긴장은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1789년 6월 20일, 제3신분의 대표자들은-귀족이나 성직자가 아닌 이들을 말한다-폐회하려는 정부의 시도에 맞서 독립적인 정치 기구인 국민의회를 유지하기로 서약했다.

    7월 12일, 평민에 협조적이었던 재정장관 자크 네케르를 왕이 해임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점점 더해 가는 불안 상태가 보수주의 반동에 진압당할 것을 두려워한 상퀼로트(글자 그대로는 '반바지를 입지 않은 이들'이라는 뜻으로, 평민을 의미한다)들은 파리의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질서 유지의 임무를 맡은 '가르드 프랑세즈' 연대와의 사이에서 긴장이 높아 갔고, 7월 14일 시위대는 앵발리드(노병을 위한 요양 병원-옮긴이)에 강제 진입해 총기를 찾았으나 화약은 없었다.

    그 이후 약 1천 명이 '바스티유'라 알려진 성으로 행진했다. 바스티유는 전통적으로 정치범을 구금하는 장소였지만, 그날에는 일곱 명밖에 없었으며, 주로 위조범이나 '광인'들이었다. 수비군은 약 60명으로 로네이 후작이 지휘하고 있었다. 오후 1시 30분경, 군중은 정문을 부수었고, 그들이 바깥쪽 구내로 진입하면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네 시간이 지나 습격한 이들 가운데 수십 명이 죽었을 무렵 성문을 부수는 데 쓸 대포가 도착했고 수비대는 항복했다. 로네이 후작은 집단 폭행으로 죽었고 군중들은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폭정의 상징인 바스티유는 신속하게 허물어졌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출처: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역사 1001 days

    제3신분인 평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난입했던 이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중요한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