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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안경곰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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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감옥 습격사건이 발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프랑스에서 예전에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한 사건이 있었는데요. 시민들이 굳이 감옥을 습격한 이유가 무엇이고 발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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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평민들이 갑자기 파리에 밀려와 프랑스 혁명의 불길이 치솟는다.

    역사 속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1789년 7월 14일 평범한 파리 시민들이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 속에 난입한 일일 것이다. 이는 격동과 혼란 속에서 군주제 타도로까지 이어졌고, 자연권과 "자유, 평등, 박애"의 원칙에 의거한 공화정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파산한 군주인 루이 16세가 170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스의 삼부회를 소집한 이후, 일 년간 긴장은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1789년 6월 20일, 제3신분의 대표자들은-귀족이나 성직자가 아닌 이들을 말한다-폐회하려는 정부의 시도에 맞서 독립적인 정치 기구인 국민의회를 유지하기로 서약했다.

    7월 12일, 평민에 협조적이었던 재정장관 자크 네케르를 왕이 해임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점점 더해 가는 불안 상태가 보수주의 반동에 진압당할 것을 두려워한 상퀼로트(글자 그대로는 '반바지를 입지 않은 이들'이라는 뜻으로, 평민을 의미한다)들은 파리의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질서 유지의 임무를 맡은 '가르드 프랑세즈' 연대와의 사이에서 긴장이 높아 갔고, 7월 14일 시위대는 앵발리드(노병을 위한 요양 병원-옮긴이)에 강제 진입해 총기를 찾았으나 화약은 없었다.

    그 이후 약 1천 명이 '바스티유'라 알려진 성으로 행진했다. 바스티유는 전통적으로 정치범을 구금하는 장소였지만, 그날에는 일곱 명밖에 없었으며, 주로 위조범이나 '광인'들이었다. 수비군은 약 60명으로 로네이 후작이 지휘하고 있었다. 오후 1시 30분경, 군중은 정문을 부수었고, 그들이 바깥쪽 구내로 진입하면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네 시간이 지나 습격한 이들 가운데 수십 명이 죽었을 무렵 성문을 부수는 데 쓸 대포가 도착했고 수비대는 항복했다. 로네이 후작은 집단 폭행으로 죽었고 군중들은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폭정의 상징인 바스티유는 신속하게 허물어졌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반란인가? / 아닙니다 폐하, 반란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루이 16세와 라 로슈푸코-리앙쿠르

    [네이버 지식백과] 바스티유 습격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 8. 20., 마이클 우드, 피터 퍼타도, 박누리, 김희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 왕권은 1789년 7월 11일 삼부회의 최고책임자인 네케르를 파면, 이 소식이 파리에 알려지자 혼란이 발생해 시민자들은 자위를 위해 성문을 굳게 닫고 각 가로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해 경계했으며 7월 14일 약 1만명의 시민이 시의 동부 요새이며 정치범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이는 격동과 혼란 속에 군주제 타도로 이어져 자연권과 자유, 평등, 박애의 원칙에 의거한 공화정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파산한 군주인 루이 16세가 170년 만에 처음으로 삼부회를 소집한 이후 일년간 긴장은 점차 고조되고있었고, 1789년 6월 20일 제3신분의 대표자들은 귀족이나 성직자가 아닌 이들을 말하며 폐회하려는 정부의 시도에 맞서 독립적인 정치 기구인 국민의회를 유지하기로 서약합니다.

    7월 12일 평민에 협조적이었던 재정장관 자크 네케르를 왕이 해임했다는 사실에 놀라 점점 더해가는 불안 상태가 보수주의 반동에 진압당할 것을 두려워한 상퀼로트들은 파리의 길거리로 나오게 되며 질서 유지의 임무를 맡은 가르드 프랑세즈 연대와의 사이에서 긴장이 높아갔고 7월 14일 시위대는 앵발리드에 강제 진입해 총기를 찾았으나 화약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 약 1천명이 바스티유라 알려진 성으로 향하는데 바스티유는 전통적으로 정치점을 구금하는 장소였지만 그날에는 7명밖에 없었고 주로 위조범이나 광인들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분노한 루이 16세는 회의당을 폐쇄한후 군대를 동원하여 테니스 코트에 집결한 '국민의회'를 탄압하려 하였다.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통하여 국민의회를 보호하고자 한 파리시민들이 무기 탈취를 위해서 7월 14일에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말았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