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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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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진의 난은 무엇을 말하는건가요?

임진왜란때 송유진 외 여러명이 변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사건을 말하는데

어떤 모의를 했고, 축출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과정이 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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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777
    나무777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송유진(宋儒眞)의 난은 1593년(선조 26) 12월에서 1594년(선조 27) 1월 아산과 평택 일대에서 일어난 반란 사건입니다.

    송유진은 학식이 뛰어났으나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가지고 있던차에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어지럽고 한성이 수복된 지 얼마 안 되어 부근의 수비도 소홀한 것을 알고 무리를 규합하여 역모를 꾀하였습니다.

    1594년 1월 3일 반란군 40여 명을 이끌고 아산현에 사는 임희지(任羲之)의 집을 포위하고 우마와 곡물을 탈취하였고, 1월 10일 여러 반란 세력과 연합하여 아산과 평택의 무기고를 탈취하고 군량미와 무기를 확보하였습니다.

    1월 11일 조정에서는 반란 세력의 존재를 파악하고 충청병사(忠淸兵使) 변양준(邊良俊),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에게 진압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1월 12일 진천의 무사(武士) 김응용(金應龍)이 반란군에 가담했던 조카 홍각(洪殼)을 설득하여 송유진을 유인, 체포하게 됩니다. 1월 17일 보령의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진술이 나오자 체포를 명하였습니다. 1월 24일 송유진을 비롯한 반란 관련자들을 궐정(闕廷)에서 임금이 직접 추국하였고, 1월 25일 송유진, 오원종(吳元宗), 김천수(金千壽) 등 주모자를 주살(誅殺)하였습니다.

    반란에 가담했던 주모자들은 사형에 처해졌고, 반란군을 잡지 못한 홍주목사(洪州牧使) 박의(朴宜)와 전 아산현감(牙山縣監) 최유원(崔有源)이 파직되었습니다. 체포된 인물 중 의병장, 현직 관리, 사족이 다수였는데 모두 심한 고문은 당했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의병장 이산겸은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4년(선조 27년) 임진왜란의 혼란중에 송유진을 중심으로 한 사회 불만 세력이 아산과 평택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사건인데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과 함께 임진왜란 기간에 일어난 대표적인 변란으로 꼽힙니다. 이들은 한양을 점령한후 선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옹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발각 되어 실패 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송유진의 난은 1594년(선조 27년)임진왜란 혼란 중에 송유진을 중심으로 한 사회불만 세력이 아산과 평택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사건입니다. 1596년에 일이난 이몽학의 난과 함께 임진왜란 기간에 일어난 대표적인 반란사건입니다. 이들은 한양을 점거한 후 선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옹립할 계획이었습니다. 때문에 비록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 사건으로 광해군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고 맙니다. 반란진압 후 대사면과 조세감면 등의 정책을 펼쳤으나 별반 효과가 없었으며 백성들의 고달픈 삶이 계속되자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재차 발생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송유진은 당초 선조 27년(1954) 정월 대보름에 일당을 이끌고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충청도 일대를 주무대로 한 이 반란음모는 본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다른 지역에까지도 상당한 동조세력을 갖고 있었다.
    반란이 발각되기 전에 송유진 일당의 포진상황을 보면 1진은 청계산에, 1진은 지리산에, 1진은 속리산에, 1진은 광덕산에 포진하는 등 여러 산골짜기에 분포된 자가 2천여 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술은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여러 지역에 그들의 동조자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송유진과 같이 거사를 계획하다가 배반하여 그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던 홍우는 선조의 문초에서 "유진의 흉칙한 정상으로는 그 군사가 10명이면 1백명이라 하고, 1백 명이면 1천명이라고 일컫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방관들의 보고 내용을 보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세력들이 서로 연계되기 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충청도 조도어사 강첨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반란군들 중에는 양반과 무관들도 섞여 있었으며, 이들이 반란에 주도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천안에서는 무기를 관리하던 관원이 송유진 일당에 사로잡히기도 하였고, 본 고을 사람 중에서도 자진하여 적중에 들어가는 자도 있었다. 중앙 정부는 천안의 군기감관 송망기 등이 반군에게 사로잡힌 사건을 중시하여, 선전관을 급히 파견하여 송망기의 거처를 탐지하는 한편, 병사 변양준과 순변사 이일 등에 명하여 비밀리에 탐문토록 하였다.
    송유진은 충청도 천안과 직산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울의 수비가 허술함을 알았고, 의병장을 사칭하여 반란세력을 규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때 지리산, 속리산, 청계산 등지에 은신하고 있는 그들 일당의 수가 2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군량미와 무기를 수집하여 양을 많이 비축하였다. 그들은 먼저 각처의 반란세력과 약속하고 군사를 움직여 아산, 평택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명기를 탈취하였고, 그 뒤 서울에 침입하기 위해 언제 먼저 전주에 밀서를 보내 국가 전복을 꾀하였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송유진의 난은 임진왜란 때인 1594년 송유진 등이 변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사건으로 1594년(선조 27) 송유진(宋儒眞, 1565∼1594) 등이 창의병(唱義兵)을 자처하며 충청도 천안(天安)ㆍ직산(稷山) 일대에서 세력을 모아 변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처형된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 기간에 송유진 등이 충청남도

    아산시와 경기도 평택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사건입니다.

    송유진(宋儒眞)의 난은 1593년(선조 26)

    12월에서 1594년(선조 27) 1월 사이 호서

    지역의 아산과 평택 일대에서 송유진을

    중심으로 한 사회 불만 세력이 결탁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4년(선조 27) 송유진(宋儒眞, 1565∼1594) 등이 창의병(唱義兵)을 자처하며 충청도 천안(天安)ㆍ직산(稷山) 일대에서 세력을 모아 변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처형된 사건입니다.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과 함께 임진왜란 기간에 일어난 대표적인 변란으로 꼽힙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송유진의 난은 1594년(선조 27) 음력 1월 11일 충청도 조도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의 보고로 조정에 알려 졌습니다. 반란군이 청계산(靑溪山)에 숨어 있으며, 춘천(春川)·해주(海州)·전라도·충청도의 세력을 모아서 음력 1월 20일에 변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이 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충청 병사 변양준(邊良俊)과 순변사 이일(李鎰)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 지역을 순시하며 반란 세력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려졌습니다.

    다음날인 음력 1월 12일 주모자로 알려진 송유진(宋儒眞)·김천수(金天壽)·오원종(吳元宗)·유춘복(柳春福) 등 10명이 직산에 살던 홍응기(洪應沂)·홍난생(洪蘭生)·홍우(洪瑀)·신계축(申癸丑)·홍찬(洪璨)·김응추(金應秋)·홍각(洪殼) 등 7인에게 붙잡히면서 반란은 곧바로 진압 되었습니다. 홍각 등은 송유진과 공모해 병사를 모았으나, 충청병사 변양준에게 회유되어 자신의 집으로 송유진 등을 불러 붙잡아 관군에 넘긴 것 이었습니다.

    관군에 붙잡힌 송유진 등은 곧바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음력 1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선조(宣祖)에게 직접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군대를 일으켜 도성을 포위한 뒤 광해군(光海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는 혐의가 씌어 졌습니다. 결국 주모자로 인정된 송유진·김천수·오원종·유춘복·김언상(金彦祥)·송만복(宋萬福)·이추(李秋)·김영(金永) 등은 음력 1월 25일 선조의 친국이 끝난 뒤 곧바로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한편, 조정은 송유진 등의 처형과 동시에 대사면을 단행해서 민심을 달래기 위한 조치도 함께 펼쳤습니다. 아울러 이산겸(李山謙)과 승려 도현(道玄) 등을 추가로 압송해서 반란 혐의를 조사했고, 그 결과 충청도 의병을 이끌던 지도자였던 이산겸은 심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송유진의 난은 선조와 조정에 대한 민심의 불만이 의병 활동과 같은 능동적 행위로 표출된 사건이었으며, 아울러 의병에 대한 왕과 조정의 적대감과 경계심이 드러난 사건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