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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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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미천왕은 왜 소금장수가 됐나요?

고구려 15대왕인 미천왕은 할아버지, 큰아버지가 왕인 왕족이었는데요. 궁궐에서 나와 나무도 하고, 소금장수 일도 하고, 다시 왕이 됐다고 하던데, 무슨일이 있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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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천왕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아버지가 반역을 의심받아 자결 명령을 받자, 궁궐에서 도망쳐 머슴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하면서 지냈다. 봉상왕(烽上王)이 실정을 거듭하자,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 등은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민간에 있던 을불(乙弗, 미천왕)을 왕으로 옹립했다. 재위기간 동안 요동 서안평(西安平) 을 차지하고,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 지역을 차지하는 등 영토 확장에 힘썼다.

    출처: 우리역사넷 미천왕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천왕 [美川王, ?~331]

    국토확장에 진력한 고구려의 제15대 왕(재위 300~331). 성 고씨(高氏)이고 이름 을불(乙弗)·우불(憂弗)이다. 서천왕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民家)에 숨어 화를 면하였으며, 소금장수 등을 하며 지냈다.

    뒤에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 등이 봉상왕을 폐하자 왕위에 올랐다. 국토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玄菟郡)을 공격, 적군 8,000명을 사로잡았다. 311년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였으며, 313년 낙랑군(樂浪郡)을 공략하여 적군 1,000명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낙랑군은 멸망하였다. 314년 대방군(帶方郡)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았다.

    요동지역을 지배해오던 진(晉)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가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구려는 영토확장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자주 충돌했다. 그래서 고구려는 진의 평주사자 최비 등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요동지역은 모용부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에도 요동을 차지하기 위해 모용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죽은 뒤 미천지원(美川之原)에 묻혔다.

    미천왕설화 [美川王說話]

    고구려 때의 설화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7 〈고구려본기〉에 전한다. 고구려 제15대 왕인 미천왕이 즉위하기 전에 왕손(王孫)의 신분을 감추고 살았던 피신시절의 행적을 전하는 이야기로서, 3세기 후반의 고구려 사회상을 전하는 사실적인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미천왕의 이름은 을불(乙弗)이며, 서천왕의 아들인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큰아버지인 봉상왕이 즉위한 다음 해에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동생 돌고를 역모자로 몰아 죽이자 을불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숨어지내야 했다. 처음에 을불은 수실촌의 부호인 음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음모는 을불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밤낮으로 심하게 일을 시켰다. 어떤 때는 연못의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밤새도록 연못에 돌을 던지게 해 잠을 자지 못하기도 했다. 이렇게 1년을 지낸 을불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집에서 나와 동촌으로 가 그곳에서 소금장수 재모를 만나 함께 소금을 팔러다니게 되었다.

    어느날 을불은 배를 타고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이란 마을로 가서 한 노파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숙식비로 소금을 달라고 해 소금 한 말을 주자, 노파는 더 달라고 했다. 을불은 한 말이면 적당한 값이라고 생각해 더 주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는 앙심을 품고 자신의 신발을 몰래 을불의 소금짐 속에 넣어두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을불이 소금짐을 지고 그 집을 나서자, 노파가 뒤쫓아와 자기 신발을 찾아내고는 압록태수에게 고소했다. 태수는 을불에게 절도죄를 물어 태형을 가하고 소금자루는 빼앗아 노파에게 주었다.

    이처럼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중 봉상왕의 폭정이 더욱 심해지자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는 무도한 왕을 폐하고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조불과 소우를 몰래 보내 을불을 찾게 했다. 비류강가에서 을불을 만난 이들은 을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창조리와 만나게 했다. 남몰래 을불을 받들던 창조리는 그 해(300년) 9월, 봉상왕이 후산(侯山)으로 사냥을 떠나자 사냥터에서 신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은 모두 나를 따라하라."고 말하며 갈대잎을 모자에 꽂으니 모두가 그렇게 했다. 봉상왕을 폐한 창조리는 을불을 즉위시켰으며, 왕위에 오른 을불은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키웠다. 331년 2월 을불이 세상을 떠나자 미천원(美川原)에 장사지내고 미천왕이라 했다.

    어려서 갖은 고생을 겪은 뒤 자라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는 백제 무왕(武王)의 어린시절 이야기인 서동요(薯童謠)나 고구려의 장군 온달(溫達) 이야기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