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는 무엇을 참고로 만들었나요?
정조시기에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면서 참고로 했던 서적이나 무예는 무엇이 있었나요? 무예도보통지는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하당 목적대로 사용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직접 편찬을 지시해 당대 동아시아의 모든 무예를 국가적 차원에서 집대성한 4권의 무예서이다. 무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 칼과 창, 권법, 마상무예까지 24기의 무예를 담고 있으며 글로 된 설명과 함께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궁술 위주의 무예를 중시했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외부의 적들에 비해 취약한 무예를 연구해야 할 필요를 느껴 다양한 무예서를 편찬했는데 그 정점에 이른 것이 바로 <무예도보통지>였다.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해 궁궐 지붕을 따라 정조의 침소 위까지 자객이 침입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놀랍게도 자객 중에는 왕의 호위군관 강용휘가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금군 150명 중 3분의 1인 50명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정도로 왕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또한 당시 한양 일대를 지키던 중앙 5군영은 노론의 사병과도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군영마다 훈련 방법이 다르고 명칭 또한 통일되지 않아 통솔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은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군권을 장악하고 통합된 군을 만들기 위한 정조의 노력이기도 했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은 규장각과 장용영이 주도했다. 규장각 초계문신 박제가와 이덕무, 그리고 장용영의 무관 백동수가 편찬에 참여했다. 세 사람은 모두 서얼 신분이었지만 정조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 위주의 인재 중용 정책을 펼쳤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이덕무와 박제가가 글을 담당했고 조선을 대표하는 무사였던 백동수는 실기를 담당했다. 그리고 도화서의 화원들이 무예 동작을 세세하게 그려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조선의 4대 문인으로 알려져 있긴 했지만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를 직접 연마하기도 했다. 백동수 역시 무인이었지만 글을 읽고 쓰는 데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모두 본인 역시 탁월한 문인이자 무인이었던 정조가 지향하던 바와 일치했다.
<무예도보통지>는 철저하게 실학적 관점으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이전까지의 군사서적은 대부분 전략과 전술 등 거시적 관점으로 만들어졌지만 <무예도보통지>는 실용적인 무예 교본으로 만들어졌다. <무예도보통지>의 실용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언해본의 제작이다. <무예도보통지>를 한글로도 제작함으로써 글을 잘 모르는 장용영 군사들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역시 무예를 익히고 무과에 급제하게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일본군과의 육상전 앞에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조선은 임진왜란 중 명나라 군사의 무예를 참고해 검과 창 등 6기의 무예를 수록한 <무예제보>를 급히 편찬한다. 그리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 <무예제보>의 6기의 무예에 12기의 무예를 더한 <무예신보>를 편찬했지만 안타깝게도 <무예신보>는 현전하지 않는다.
정조는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기병무예 등 6기를 <무예신보>에 다시 더해 <무예도보통지>를 만든다. 왕으로 즉위하며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천명했던 정조는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사도세자의 의지를 공식적으로 계승한 셈이다. 이후 정조가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를 무과에 추가함으로써 <무예도보통지>는 조선군의 공식무예서가 되었다.
서울시 남산 자락 장충관 뒤의 유서 깊은 활쏘기 터인 석호정에는 1897년 십팔기 옛터에 석호정을 지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즉 장충단 공원 인근이 십팔기의 옛터라는 의미다. 또한 장충단 인근 비파정에서는 별기군이 십팔기를 수련하기도 했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군의 무예 교본으로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출처 : KBS 천상의 컬렉션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나라 시대의 모원의(茅元儀)가 저술한 《무비지》(武備志)를 수입해서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1759년(영조 35년)에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세자가 대리 청정을 하던 시기, 《무예제보》에 12종을 더 늘려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죽장창, 기창(旗槍. 깃발 달린 창), 예도, 왜검, 교전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의 18가지 보병 무예로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해진 18종의 무술을 18기(十八技)라고 부르는 것인데 애석하게도 《무예신보》는 현재 전해지지 않습니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무예도보통지》의 구본격으로 추측 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예도보통지는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해 편찬한 군서입니다.
전통적으로 조선은 궁시 기예는 알아주는 나라였으나 오랜 평화로 군사 훈련을 소홀하게 되어 후에 군대가 단병접전에 능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고,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에게 근접전에서 참패하여 그 문제점이 드러나자 선조의 명으로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대왜구 전법인 절강병법을 참고, 속오법과 삼수기법을 도입하는 군제개혁을 단행합니다.
기효신서를 분석하고 명나라 병사들의 훈련을 참관해 1598년 한교가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의 무예육기를 담은 무예제보를 편찬,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 광해군 때는 선조의 뜻을 받들어 무예제보에서 빠진 부분을 추가, 일본에서 구한 서적의 번역을 덧붙인 무예제보번역속집을 내놓습니다.
영조시대 청나라를 거쳐 명대의 모원의가 저술한 무비지를 수입해 영향을 받았는데 1759년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세자가 대리 청정을 하던 시기, 무예제보에 12종을 더 늘려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월도, 협도 ,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의 18가지 보병 무예로 무예신보를 편찬합니다.
정조 14년 명나라 말기 기효신서와 무비지, 조선의 무예제보, 무예신보 등을 기초로 해 보명 18기와 함께 마상 6기를 추가해 24기를 갖추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