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로고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7

신라 골품제도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신라가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김씨 왕족이 왕위를 세습하였고 김씨 왕족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골품제도를 마련하여 통치기반을 구축하였다고 하는데요. 신라의 골품제도 구체적인 내용과 성격은 어땠는지 자세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골품제도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왕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한 두품제로 구분되며 골품제는 이를 합쳐 부르는 말입니다. 원래 신라는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의 6부를 중심으로 주변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며 성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복속된 소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를 경주로 이주시켜, 지배층인 6부에 편입시키고, 다른 일부는 원거주지의 촌주로삼아 복속지역 통치에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가야국출신의 왕족을 진골로 편입시키기 했습니다. 김유신이 가야왕조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골품제도는 성골과 진골로 나뉩니다.

    성골은 골족 중에서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입니다.

    선덕여왕도 성골 남자가 없어서 왕이 된걸로 알려져있으며 신라에만 골품제도로 인해 여왕이 존재하지요.

    진골은 골족으로서 진골 역시 왕족입니다. 신라의 지배계층의 핵심을 담당하였습니다.

    최초로 진골출신의 왕인 김춘추 무열왕이 있지요.

    6두품은 두품수가 높을 수록 상위 신분입니다. 이 신분 역시 경위에 진출할 수 있는 상위 신분입니다. 이 가운데 6두품은 진골에 비해 신분상승에 특히 제한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득난으로 불릴정도로 귀성이었습니다. 6두품도 엄청난 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5두품~4두품은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국가의 잡다한 실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신분은 정해진 게 아니라서, 진골의 경우에도 강등되어 6두품이 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또한 골품제는 신라에만 있는 독특한 신분체계로서, 초창기에는 신라 중앙집권체계의 큰 역할을 했지만, 후대에 와서는 그 신분의 폐쇄성 때문에, 하위계층에서 많은 불만이 있었습니다. 또한 상위 계층인 진골의 부패와 폐단으로 나라의 망국적인 형태가 일어나자, 신분에 불만을 품은 6두품들은 지방의 호족들과 결탁하여, 후삼국시대를 열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신분제로 인한 폐쇄성과 고위층의 부패로 인해 신라가 망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4.27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골품 제도는 신라 사회의 신분제이다. 혈통에 따라 신분에 일부 제한을 두었던 폐쇄적인 신분 제도로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이래 멸망할 때까지 약 1000여 년간 신라 사회의 기본 성향의 패러다임이었으며, 이웃인 고대 일본의 성씨제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설도 있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