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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4.23

발해는 왜 멸망했는지 알수 있을가요?

안녕하세요? 발해는 고구려 나라를 계승한 걸로 알고 있는데 굉장히 강성했던 나라라고 알고 있습니다. 발해의 멸망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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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3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는 고구려인 대조영이 세운 국가이고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습니다. 문왕 때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육로를 뚫어 ‘신라도’가 생겼고 선왕 때 발해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다. 중국에선 발해를 바다 동쪽에서 번성한 나라라 해서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발해는 내분과 거란족의 침입으로 인해 멸망하고 일부 발해 유이민들이 고려로 흡수되면서 민족이 재통일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학계에서는 발해의 멸망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장 흥미로운 학설 중 하나가 백두산 폭발설입니다. 실제로 백두산 지질을 분석해보니까 발해가 망한 900년대 폭발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분명히 기후가 변화해 농사가 타격을 입을 거고요, 농사가 타격을 입으면 세금을 안정적으로 걷지 못해 나라가 어려워졌을 거란 거죠.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명입니다. 요즘에 백두산 폭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죠? 만약 폭발한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네이버 지식백과] 발해 - 해동성국이 탄생하다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2015. 12. 11., 이다지)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90년 발해의 주변 나라들이 변화를 겪는데 통일신라는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 세 나라로 나뉘고 당나라도 서서히 힘을 잃고있는 상황에서 당나라의 북쪽에 있던 거란이 주변 나라를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거란은 먼저 발해를 공격했는데 당시 발해는 귀족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 끊임없이 싸워 힘이 약해져있을때였기 때문에 발해는 거란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926년 멸망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해서 내분설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15대 대인수는 무능한 임금으로 발해를 멸망시킨 죄인으로 취급 받고 있다. 지금까지 발해 멸망은 이원적 민족 구성에 의한 한계 및 정치.경제적인 혼란으로 인한 통치 계급의 모순,방위력 한계 등으로 발해는 요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도 못한 채 멸망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발해 후반기 25여년을 재검토해 보면서,발해가 멸망하게 된 원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김은국 교수님은 발해 대인수 시기를 좀 더 세분화하여 900년대 초부터 918년까지를 발해와 거란의 충돌기,그리고 919년부터 925년까지 거란에 의한 발해 압박기,멸망기는 925년 말부터 이듬해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왕계 단절이 되는 시기로 설정하고 있다.

    발해와 요의 전쟁은 무려 20여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

    요동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는 요의 승리로 일단락되고 발해는 요동 지역의 전략적 이점을 상실하면서 경제.군사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비록 발해는 요동 지역을 상실했지만,아직 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국가였다.그것은 919년 요의 침입에,924년 5월 발해가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서 함락 시킨 후,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발해의 군사력이 건재하다는 것이다.

    당시 국제적 환경은 중국 지역이 5호10국시대,한반도 남부 지역은 후삼국으로 분열이 된 혼란기였다 이런 가운데 15대 인선왕은 군사적인 대응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적절히 요를 견제 하였는데, 주변 국가와 결속을 맺어 요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요사 본기에 '이심'이라는 표현대로,924년 여름을 기점으로 하여 발해에 내부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추측 된다.그것은 925년부터 고려로 망명하는 발해인이 장군 등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귀화한 것이다. 이것은 발해 내부에 또 다시 정치 투쟁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 된다.이런 내부적 상황을 파악한 요나라는 20여년간의 전쟁 경험을 통한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전술을 계획한 것이다.즉,대규모 기습 작전을 통한 '수도 함락'이었던 것이다.

    발해의 중앙 정부는, 요군이 서쪽으로 공격할 것을 예상해서 요동 지역과 인접한 장령부에 대규모 부대를 파견했을 것이며,북쪽에는 요충지인 부여성이 건재하기에 요군의 대부대가 아닌 이상에는 점령하기 힘들 것라고 판단 했을 것이다.

    발해 멸망 후,장령부가 6개월간 단독으로 전투를 한 것은 발해의 대부대가 상주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그러나 요군은 10만명의 병력에다 5만의 병력을 출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요군의 기습에 부여성은 3일간이나 버티지만, 대공세에 함락 되었다.

    당시 요사에도 부여성의 전투에..." 힘을 다하여 부여성을 함락시켰으나,몸에 여러군데 상처를 입어 태조(야율아보기)가 친히 그를 위해 약을 지었다.."라는 기록은 부여성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부여성 함락 후,요군은 바로 상경용천부로 진격해서 수도를 공격하였다. 상경용천부를 방어하는 3만 발해군이 10만 요군과 접전을 했지만 우수한 기동력의 기병에 비해,수도 방어를 위해 대다수 보병으로 구성 되어진 병력으로 접전하기는 열세였으며,3만 발해군이 무너지고 수도는 바로 요군에 함락된 것이다.부여성 함락 후 6일만에 상경용천부가 포위되고 요군에 항복한 상황에서, 주변의 발해군은 미처 도움을 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수도는 함락되어 왕조는 단절되었지만,다행히 발해 세자 대광현은 탈출하여 인선왕을 대신하여 발해군을 지휘 했다고 본다.장령부 지역의 발해군은 6개월간 요군과 전투를 하였으며,중앙 정부가 무너진 상태에서 전투를 벌렸다는 것은 그 의의가 크다.

    중앙 정부는 항복 했지만 ,결코 요군은 발해 전 지역을 통치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