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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하외탈은 언제부터 만들었나요?

경상북도 안동시에가면 하외마을이 있는데 에로부터 하외탈을 만들어서 인간의 해악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탈의 역사는 오래된것으로 아는데 언제부터 안동에서 하외탈을 만들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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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하회탈이 언제부터 탄생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허도령 전설이 시기를 대략적으로 짐작게 한다고합니다.

      하회탈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고려 중엽 약 12세기 경으로 추정된다고합니다.

      당시 하회마을엔 허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하는데, 그때 마을에 재앙이 들어 사람의 힘으론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고합니다. 그 때 당시 마을에 살던 허도령이라는 사람의 꿈에 신이 나타나 "탈을 12개 만들어서 그것을 쓰고 굿을 하면 재앙이 물러갈 것"이라고 계시를 하며 탈이 "다만들어 질 때까지 누구도 들여다 보게 해서는 안된다"는 금기까지 일러 주었다고 합니다.


      출처 - 나무위키 하회탈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하회탈은 고려 중기 혹은 후기에 만들어져 병신탈과 함께 현전하는 국보 제 121호로 지정된 탈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하회마을에서 만들어져 전해지고 있는 하회탈의 구체적인 탄생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오래전부터 구전으로 허도령이 탈을 만들어 이어오고 있다는 말이 있다. 하회마을 자체 기록에 따르면 허씨 일가가 안씨가 들어오기 전에 이곳에 살았고 그 후인 조선 전기에 유씨 일파가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문화재청에서는 고려 중기 대부터 탈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을 경배하고자 매년 정월대보름 즈음에 탈놀이를 하며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했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에서 행해졌던 탈놀이는 대개 놀이가 끝나면 탈을 다 태우는 것으로 일단락 됐지만 하회탈의 경우에는 다루는 법과 보존에 있어 엄격했으며 함부로 다루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만들며 그 위에 옻칠은 두세번하여 정교한 색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턱 부분은 턱이 없는 이매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따로 조각되어 있어서 아래턱 부분을 끈으로 이어 움직이게 한다. 이는 더욱 생동감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한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나 정확한 시기와 누가 만들었는지 기록은 찾아보아도 없네요 ㅠ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탈이나 탈놀음의 시작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된 패면(貝面)과 강원도 양구에서 출토된 토면(土面) 등 신석기시대의 가면유물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뒤 6세기경의 것으로 추측되는 나무로 만든 옻칠을 한 탈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1946년 경주 노서리 고분인 호우총에서 출토된 유물가면으로 그 구조는 나무로 만든 탈에 옻칠을 한 것인데, 눈알은 유리이고 두 눈에는 황금으로 된 환(環)이 둘려져 있습니다.


      이 탈은 방상시가면으로 보이는데, 방상시가면은 황금사목(黃金四目)을 연상하게 되므로 그 탈의 눈이 두 눈인 것이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하지만 『태평광기』 견이록(甄異錄)에 두 눈의 방상시가면이 있음을 말하고 있고, 『순자』 비상편(非常篇)에도 두 눈의 방상시가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탈은 방상시가면이 틀림없습니다. 신라시대의 이 탈은 당시 왕후·귀족들의 상례 때에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해석과는 달리 이 유물은 탈이 아니라 화살통이라는 견해도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 밖에 덕물산가면(德物山假面)과 1964년 국보로 지정된 13개의 하회(河回)탈 및 병산(屛山)탈 등 옛 가면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 제사조(祭祀條)에 보이는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 중 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狻猊)의 네 가지이므로, 이는 실로 9세기 말엽의 일로 탈 및 탈놀음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