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시해된 이후 그 시신을 찾지 못했나요
을미사변이라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는데요 들은 얘기로는 명성황후 시신을 찾지 못 하여서 왕비 릉에는 시신이 없다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이것이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전 4시에 이순근(李巡根)이 나를 깨웠다. 길거리에서 주웠다는 서신을 내게 보여주었는데, 이두황(李斗璜)과 일본인 교관 무라이(村井) 휘하에 있는 대대병력이 부대를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을 향해 갔다고 하는 것을 제1연대장에게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 서한은 군 장교 이민굉(李敏宏)이 서명한 것이었다. 이순근에게 그 편지를 경무사에게 가져가 보이라고 했다.
5시에 의화군이 궁으로부터 찾아왔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 데 일본 군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영추문 즉 궁의 서쪽 문으로 이동하고, 조선군 훈련대가 건춘문과 춘생문으로 가는 것을 목격했단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피기 위해 전하가 왕자를 내보냈던 것이다.
5시 30분 쯤 날카로운 총소리가 몇 분 동안 들렸다. 사방이 고요했다. 일본군이 궁중으로 쳐들어갔다. 그 공격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조선군 훈련대는 달아났다. 홍 장군(洪載熙)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대원군을 옹위해 궁으로 쳐들어갔다. 일본군이 각 문을 경계했다. 김홍집·김윤식·조희연만이 입궐이 허용되었다.3
오후 1시 의화군이 와서 이렇게 전해 주었다. 그가 궁을 떠난 직후 칼 찬 일군의 일본인이 전하와 세자가 거처하던 침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황후를 찾아다녔다. 그들을 시녀 두세 명을 황후가 틀림없다고 여겨 아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들은 세자비의 머리를 잡아채어 발로 차고 구타하고 질질 끌면서 황후가 어디 있는지를 말하도록 강요했다. 대답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세자비를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은 군인들 사이로 던져버렸다. 한 일본인이 세자의 머리를 잡아채고 발로 걷어찼다. 그 사이에 100명에 이르는 궁녀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 때 황후가 나타났다. 일본인 하나가 황후를 붙잡아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황후는 자신이 황후가 아니라 먹을 것을 찾으러 들어왔을 뿐이라고 외쳤다. 자객들이 황후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걷어찼다. 그러고 나서 암살자들은 그녀를 한 방으로 끌고 가서 홑이불로 그녀를 덮었다. 그러고 나서 황후인지를 확인하고자 일본인 통역 스즈키(鈴木)가 궁을 가리키면서 한 상궁에게 말하기를 황후가 “그 방”에 누워있다고 말했다. 그 상궁은 방으로 들어갔고 유혈이 낭자한 광경에 충격을 받아 공포에 질려 달려 나오면서, “오, 황후께서 승하하셨다!”고 울부짖었다. 이 소리를 들은 암살자들은 달려 들어와 황후의 시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꽃밭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그들은 황후의 시신을 내려놓고 불을 질렀다. 이 모든 얘기는 너무 공포스러워 상상하기도 어렵다국역 윤치호의 일기 1895년 10월 8일(음력 20일)
왕비는 침입자들을 피해 달아나다 넘어져 칼에 찔려 상처를 입었다. 그때 한 일본인이 그에게 덤벼들어 가슴을 마구 찔렀다. ... 일본인들은 왕비를 널빤지에 올려놓고 비단으로 싸서 녹원의 소나무 숲으로 옮겨가 나뭇단에 등유를 부은 뒤 시신을 불태웠다. 남은 것이라고는 뼈 몇 마디뿐이었다.
44세 나이의 왕비는 한 우방국 공사의 피비린내 나는 음모에 자극을 받은 자객들의 손에 그렇게 죽어갔다. 그녀는 영리하고 야망이 있으며 음모적이고 매력있고 아름다웠던 왕비였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출처: 나무위키 을미사변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우라 고로 공사는 아침에 경복궁에 들어와 고종을 알현하고 도중 밖으로 나와 직접 왕후의 시체를 확인한 뒤 낭인들에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체를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후 미우라가 고종, 흥선대원군과 함께 3자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낭인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궁 동쪽 녹원으로 가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