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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23.09.11

첨성대가 천문을 보던곳이라는 근거가 있나요?

첨성대라는 명칭말고 첨성대가 실제로 별을 관측하던 곳이라는 근거가 있나요? 첨성대 이용의 기록이 있나요? 후대에 와서 추측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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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1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별기에 따르면 이 왕(선덕여왕)의 치세에 석축을 쌓아 첨성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 중에서
    선덕여왕 때 지어진 신라시대의 천문대. 신라 왕궁 터인 반월성의 북서쪽 성곽에서 약 300 m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국보 제31호이고, 그 원형을 유지하는 것 가운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입니다. 한반도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후대의 복원이나 재건 없이 창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된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첨성대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전통적으로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의 기능을 했으리라 여겨져왔다. 1960년대 이전에는 별 이견이 없이 1904년 세키노 타다시와[5] 와다 유지,[6] 1917년 루퍼스(Rufus,W.C.)에[7]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그 위에 목조 구조물이 세워져 혼천의(渾天儀)가 설치되었으리라는 생각과, 개방식 ‘돔’으로서의 관측대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첨성대는 창문을 제외하면 어느 방향에서나 같은 모양이며, 계절과 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구(日晷)를 측정하여 시간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4가지 계절과 24절기를 확실히 정할 수 있다. 정남(正南)으로 열린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오르내리는 데도 쓰였지만, 춘·추분(春·秋分)에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바로 대(臺)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동·하지(冬·夏至)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분점(分點)과 지점(至點) 측정의 보조역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절기의 정확한 측정에 의하여 역법(曆法)을 바로 잡기 위한 측경(測景)을 목적으로 설립된 규표(圭表), 즉 측경대로서 일구를 측정하는 천문대일 뿐 아니라, 신라 천문 관측의 중심지로서, 신라 천문 관측에서 자오선과 동서남북 4방위의 표준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과거 작성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고, '서운관지'와 '문헌비고'에도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럼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복 이후 새로운 견해가 나오는데,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의 기록이 없으며 삼국유사에는 명칭과 용도, 사람이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그렇다고 하기엔 내부가 매우 좁고 불편하며 천문 관측을 하는 시설인데 왕궁 옆의 평지에 건설되었다는 것도 의문점이었습니다.

    이에 첨성대의 역할이 천문대가 아니라 일종의 기념비, 제단, 창고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등장하나, 문헌적 ,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확신이 불가능하며 주류 학계에서는 정사에 기록된 통설과 신라 천문 기록의 정황 연구 등을 토대로 첨성대가 천문대였음을 정론으로 받아들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