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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이의 10만양병설은 그당시에 현실성이 있는 주장이었었나요?

임진왜란전에 율곡이이가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사실인가요? 그리고 율곡이이의 10만양병설은 그당시 기준으로 볼때 현실성이 있는 주장이었나요? 그리고 율곡이이의 10만양병설이 실현되지 않았던 시대적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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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일본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전하였습니다. 이때 통신사로 일본을 살피고 온 김성일은 함께 갔던 황윤길과는 달리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이다. 민심을 잃으면 성과 무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며 전쟁 준비에 반대하였습니다

    1583년 어느 날, 국방을 책임지고 있던 이이가 왕을 찾았습니다.

    나라가 오랫동안 태평하다 보니 군대와 식량이 모두 준비되어 있지 않아, 오랑캐가 변경을 소란하게만 하여도 온 나라가 술렁입니다. 지금대로라면 큰 적이 침범해 왔을 때 어떤 지혜로도 당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 《선조실록》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국가는 항상 전쟁 준비를 갖춰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 북쪽에서 여진족과 크고 작은 전투가 있던 터이라, 이이의 주장은 제법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이이는 10만 군사를 길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자며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얼마 뒤 일본에서 심상치 않은 소식이 전하였다. 120여 년간 분열되어 있던 일본이 통일되었고, 머지않아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두 사신의 의견이 달라 조정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서둘러 전쟁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성일은 침략 가능성이 높지 않다며 이에 반대하였다. 토론은 큰 성과 없이 끝났고, 조정에서는 급한 대로 몇 가지만 준비한 채 한 해를 보냈다.

    1년 뒤 조총을 비롯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였다.(1592, 임진왜란) 2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019.03.04., 전국역사교사모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만양병설은 당시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조선인구가 1200만정도였고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훈련하고 먹이는 비용은 조선으로서는 할수 없는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10만의 군대를 모았다 해도 백성들의 민심이 나라를 떠나버리기 때문에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200만 중 절반은 여자이며 나머지 600만 중에서 왕족, 양반, 노비 등의 천민을 제외하면 징발대상은 한정적이며 조선인구에서 성인 남성 10만을 차출하면 조선 경제를 마비시킬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율곡이이는 도성에 2만 각도에 1만으로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동인들의 반대로 무산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시 동인들도 후회했다고 하며 당시 실현되지 않았던 이유는 10만을 유지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당시 조선은 양반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없었고 무보다는 문을 중시하는 문화적 풍토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징집을 하려 징집령을 내렸더니 자신이 보던 서책을 들고 온 사람들, 여러 핑계를 대는 사람들로 인해 징집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미 국가에 상무정신이 사라진지 오래고 그저 성리학의 나라 이념적인 나라로 되어 버려 실전적인 군대가 유지

    안 되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듭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율곡 이이의 '십만영병설'은 당시에 그리 현실성 있는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군인 부족 문제가 심각했고, 군사력 강화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실시된 것이 바로 '무과정진법'이라는 군사 채용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이는 이러한 대책으로는 군대를 충원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신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는 그 당시에는 현실성이 없는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고려시대에도 등장한 '농민군사제'와 같은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이후에는 일제강점기에 국민군 운동으로 이어지며, 지금까지도 군대와 국방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큰 촉진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이의 주장은 그 당시에는 현실성이 없었지만, 시대가 변화하면서 현실성을 갖게 되었고, 그 의미는 크게 인정받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