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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헌 안양의 일생과 업적은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고려시대의 학자였던 회헌 안양의 일생은 어떠했나요?

안양은 어떠한 삶을 살았으며

그 사람의 업적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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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향은 고려의 무신 정권시기인 1243년에 태어났고 당시 고려 사회는 무신들이 권력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면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모범을 보여야 할 불교계가 부패하자 무속이 성행했으며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국토도 황폐해졌습니다.

      안향은 고려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 1289년 충렬왕 공주를 모시고 원에 갔다가 돌아와 원에서 주자학을 접한 뒤 고려의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바로 주자학이라 생각해 직접 배껴 쓴 주자전서와 직접 그린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왔고 이후 여러차례 원을 방문했는데 더욱 더 주자학에 빠져들어 고려에 주자학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안향은 고려 왕실에 학교를 세우고 장학 기금을 만들고자 건의하여 주자학을 가르쳐 인재를 길러 내는 일이 고려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으며 원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공자의 초상과 주자학에 관한 책을 계속 들여왔으며 120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향은 본래 경상북도 흥주 출신으로 순흥이 본관입니다. 처음 이름은 유(裕)이고,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입니다. 아버지는 밀직부사 부, 어머니는 강주 우씨로 예빈승 성윤의 딸이었습니다. 시호는 문성입니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한 안향은 교서랑이 된 이래 유교 사상에 따라 혹세무민하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리도록 국왕에게 간언하였습니다. 1289년(충렬왕 15년) 원나라 황제가 고려유학제거로 임명했으며, 같은 해 11월 국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 박사 김문정으로 하여금 공자 및 제자들의 초상화와 경전과 사서 등을 수집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인재 양성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섬학전을 두고 경사교수도감사를 두어 다시금 경전 공부를 장려하였으며, 만년에 주자의 초상을 걸어 놓고 경모하는 등 주자를 신봉하며 유학과 성리학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안향 이전 고려에서는 이미 문종대 최충 등이 설립한 9재 학당과 9경의 강론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종 대 경학 강론이 지속되었고, 김인존이 쓴 청연각기에 “성명 도덕의 이가 충만하였다”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자체적으로 유학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원나라는 건국과 함께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주자 성리학이 보편화되었고 주자서 등이 유포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하고 섬학전을 설치하여 이를 보급한 고려의 문신. 초명은 유, 자는 사온, 호는 회헌이고 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해 교서랑을 거쳐 직한림원이 됐다. 문교부흥의 기운이 소생하기 시작한 충렬왕 때 원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원나라를 왕래하며 학풍을 견학하고 이를 최초로 국내에 들여왔다. 이는 한국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고려의 불교세력과 대항하고 나아가 그것을 압도하면서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으로까지 성장했다.


      안향은 고려 말 인물로 경상북도 영주 순흥(順興) 고을 출신이다. 그는 불교가 지배한 시대를 살았고, 무신 집권기와 수차례 몽고의 침략 등 시련을 겪으면서 올곧게 학문과 수양에 매진할 수 없었던 때에 고려의 관료로서는 최초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 연구했을 뿐 아니라 후진에게 전수할 목적으로 교육에도 부심했다.

      그의 문하에서 소위 ‘육군자(六君子)’가 배출되었다. 그의 노력은 관학의 부흥을 가져와 많은 인재를 양성했고, 이들은 조선 개국의 동인으로 작용했다. 그는 주자의 저술을 집대성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손수 베껴와 철저하게 연구하고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 이를 벽에 걸고 평생을 경배했다. 자신의 아호도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에서 따 회헌(晦軒)이라고 했다. 철저한 ‘따라 배우기’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