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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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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으로 봉수제는 언제 시행되었나요?

안녕하세요.

한국 역사적으로 '봉수제'는 언제 어느시기부터 시행되었나요?

봉수제가 시행된 이유와

그 시대의 배경은 어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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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지방의 전쟁 상황을 중앙에 알리던 군사 통신 제도이다. 삼국 시대부터 시행되었고, 고려 시대에 제도화되었으며, 조선 세종 때 전국적으로 정비되었다.

    봉수의 수에 따라 신호의 내용은 달랐다. 평소에는 1개였으나 2개부터는 적의 움직임이 파악되었거나 침입했다는 뜻으로, 상부 기관에 반드시 전달해야 했다.
    봉수대에는 불을 피우는 굴뚝은 물론 봉수대를 지키며 관리하는 군사들이 머무는 곳이 함께 마련되었다. 봉수대는 상황에 따라 나라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설이었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게 관리했다.

    통신 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옛날에는 긴급한 일이 생겼을 때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불이나 연기를 이용해 소식을 전했다. 이때 불을 사용해 소식을 전하는 것을 봉화, 연기로 하는 것은 봉수라고 불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미 가야를 세운 김수로왕 때 횃불을 썼다고 하니, 봉화의 역사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봉화나 봉수를 올리는 것은 대개 전쟁과 같이 위급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였다. 국경이나 해안에서 적이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면 시야가 트인 산 위에 마련된 봉수대에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올렸다. 그리고 불이나 연기는 전국 곳곳에 연달아 마련된 봉수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도성의 봉수대에 전달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에서 가까운 목멱산 봉수대까지 이르렀다.

    봉수대에서 신호를 보내는 방식은 굴뚝을 통해 피우는 불꽃이나 연기의 숫자로 결정했다. 즉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바다나 국경에 나타나면 둘, 가까이 오면 셋, 우리 배를 공격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넷, 상륙하거나 전투가 벌어지면 다섯 개의 봉수를 올리도록 했다. 특히 조선 시대 봉수로의 최종 집결지인 목멱산에는 중요 봉수로를 담당하는 5개의 봉수대가 있었고, 국방에 관한 일을 맡아 했던 관청인 병조에서 매일 새벽 이 봉수 상황을 왕에게 보고했다.

    정상적으로 봉수가 전달될 경우에는 국경에서 도성까지 12시간 내에 상황이 전해졌으나, 실제로는 중간에 전달이 되지 않거나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정은 봉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경우, 매우 엄한 형벌을 내렸지만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봉수를 담당하는 역은 산에 오가기가 힘들고, 잠시도 쉬지 않고 지켜야 할 뿐 아니라, 혹시라도 신호를 놓칠 경우 엄한 벌을 받았으므로 매우 힘든 일이었다. 봉수 제도는 임진왜란 이후 사실상 기능을 하지 못하다가 1890년대에 전화가 도입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수 제도 - 불이나 연기를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던 군사 통신 제도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 제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심했던 고려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양한 봉수대 정보가 지역n문화 사이트에 있어 링크 공유해 드립니다.

    https://local.nculture.org/tiekf

  • 봉수제는 조선시대에 시행된 정책으로, 정확한 시작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세기 중반부터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봉수제는 농업에 종사하는 자들에게 일정한 수를 배분하여 산출량을 조절하고 농업 생산을 안정시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봉수제는 주로 곡식에 적용되었으며, 농민들의 곡식 생산량을 제한하고 재고를 조절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전쟁, 기근, 재해 등의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할 경우에도 국가적으로 식량 안정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농업 생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방관들이 농사를 돕고 지도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봉수제의 시행은 토지 소유와 경작지 관리에 대한 규제로 이어졌으며, 이는 농민들의 불만과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봉수제는 일정한 식량 공급을 유지하고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 말기에는 봉수제의 효과가 감소하면서 점차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군사적인 목적에서 설치된 봉수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13세기)입니다. 그러나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횃불과 연기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지혜는 일찍부터 발달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중국에서는 이미 주나라시대부터 시작하여 전한(前漢)시대에 봉수가 있었다고 하며, 그것은 점점 발달하여 당나라시대에는 완전히 제도화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수로왕의 치세중에 이미 봉화를 사용하였다고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0년 조(條)의 ‘봉현(烽峴)’을 비롯하여 봉산(烽山) · 봉산성(烽山城) 등의 기록이 나타납니다.

    수로왕이 유천간(留天干)을 시켜서 망산도(望山島) 앞바다에 나가 붉은 돛에 붉은 기를 단 배가 나타나면 봉화로써 통지하게 하라고 한 기록은 일반적 의미의 봉화임에 틀림이 없겠고, 『삼국사기』에 보이는 봉산성 등의 기록도 이미 봉수제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새 왕조를 창건한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모든 문물제도에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이후, 개혁을 거듭하여 점점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봉수제 역시 고려시대의 것을 이어받았습니다.

    특히 고려 말에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봉수제를 강화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에 이르러 이미 봉수제가 실시되고 있음을 기록을 통하여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1406년(태종 6) 12월에 자주인(慈州人) 조수일(曺守一) 등을 거제현(巨濟縣) 봉졸로 장배(杖配)하였다고 하고, 1408년 1월에는 연해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만호(萬戶)와 천호(千戶) 등을 단속할 목적으로 해도찰방(海道察訪)을 하삼도(下三道)에 보내면서, 봉화로써 해상을 간망함은 군사상 긴요하므로 만약 이를 소홀히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엄중히 다루라고 지시한 바가 있습니다.

    그 뒤 봉수제는 세종 때에 이르러 종래에 계승되어 온 고려의 봉수제를 바탕으로 하고 당나라의 제도를 크게 참고하여 거화거수(擧火炬數) 등 관계규식(關係規式)을 새로 정하며 제도연변(諸道沿邊)의 각 연대(烟臺)를 새로이 축조하고 나아가 봉수선로(烽燧線路)를 일제히 획정하는 등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수가 행해진 것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였으나 본격적으로 법제화된 것은 고려 후기였다. 조선의 봉수제는 이를 토대로 하여 정비되었다. 원래 봉수란 용어는 밤에 불로서 알리는 봉인 燃烽과 낮에 연기로서 알리는 수, 즉 燔燧를 합친 말이다.

    -출처: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