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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 황제는 왜 아들도 아닌 동생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인가요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임금은 나이도 젊고 건강했는데 왜 아들도 아닌 동생인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했는지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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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늦둥이인 점도 있으며 당시 친모 순헌황귀비가 궁궐에서의 영향력이 컸던 탓인지 태어나자마자 귀하게 자랐다고 하며 이 덕분인지 1907년 순종 즉위 후 다음 제위 계승 1순위였던 이복형 의친왕을 제치고 대한제국 황태자로 봉해졌습니다.

    연령으로 보면 영친왕보다 20년 연상인 의친왕이 다음으로 황태자가 될 수 도 있었으나 당시 여러 환경이 의친왕보다 영친왕에게 유리했습니다. 의친왕이 문제가 많아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엄귀비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막후에 힘을 써 황태자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엄귀비는 당시 내명부에서 가장 높은 직책이었지만 의친왕의 생모인 후궁 귀인 장씨는 직첩도 보잘것 없는데다 오래 전 별세한 상태, 엄귀비는 고종이 사선을 넘나든 아관파천 당시 가까이서 고종을 보필한 공이있는 만큼 다른 후궁들보다 총애를 남다르게 받았고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정 1품 황귀비의 직책을 받아 영친왕에 힘을 실어줄수 있었습니다.

    또한 연구자들은 1902년 있던 일심회 사건 또한 황태자 책봉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데 이 사건은 일본에 국비로 유학한 재일 유학생 일부가 고종을 양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획책한 사건으로 당시 의친왕은 한창 미국 로어노크 대학교에 유학중이었으므로 의친왕의 의사와 무관하게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이후 사건이 밝혀져 가담자들 일부는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고 주동자 3인은 처형당했으나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의친왕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5년 이후 황태자를 책봉할 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듯 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몸이 병약 하여 아들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후궁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뒤를 이를 황태자를 어쩔 수 없이 동생인 영친왕으로 책봉 할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노인옥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 황제는 안타깝게도 1907년에 일본의 압력으로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었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으로 폐위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순종은 자신의 후계자를 정할 수 없었고, 일본이 순종의 동생인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그를 조종하여 조선을 더욱 통제하려 했습니다.

    순종은 이에 반대했지만, 일본의 위협적인 태도와 친일파 신하들로 인해 결국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제 답변이 질문자님께 도움이 되셨길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