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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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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중에서 경찰 3.1절 발포사건은?

제주 4.3사건에 대해서 보면 원인으로 보는 경찰 3.1절 발포사건이 나오는데

이는 어떠한 사건이었길래 제주 4.3사건과 연관이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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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개의 답변이 있어요!
    • 대나무
      대나무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습니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습니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합니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제주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제주 4·3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3·1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3·1사건에 항의하여

      1947년 3월 10일부터 유래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습니다.

      제주도민의 민·관 총파업에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했습니다.

      본토에서 응원 경찰이 대거 파견됐고,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시켰고,

      이는 4·3사건 발발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반 된 민심과 5·10 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결합하여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군병력이 증파되어 진압 작전과 대대적인 강경 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됩니다.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제주 4.3 사건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집단 희생의 아픈 역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찰이 3.1에 발포를 한 이유는

      제주 도민들의 반미 운동과 맞물려서

      3.1절에 시위를 하다가 경찰과 대치중

      어린이가 기마대에 치어서 죽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에 격분하여 아수라장이 되고 그걸 경찰이

      발포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4.3사건이

      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찰 3.1절 발포사건은 1948년 3월 1일 대한민국 경찰이 3.1절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인원들을 제주도에서 쫓던 중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경찰은 인명 피해를 미치며 인도주의적 대응으로 인해 더욱 복잡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이러한 사건이 제주도 내에서 민간인들 간의 갈등과 적대감을 부추기면서, 제주 4.3사건의 원인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 4.3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은 1947년 3.1절 기념식이었습니다.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1947년 3.1절 기념식에 3만여명의 시민이 모였는데, 이승만과 미군정이 추진하는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요구를 하였습니다. 기념식에서 미군정의 방침에 반대하는 표어가 등장하자,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시민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갈등이 확산되어 4.3 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찰 3.1절 발포사건은 1948년 3월 1일 진행된 3.1 운동 때 발생한 사건으로, 제주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3.1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단순히 민중 집단으로 취급하지 않고, 공산주의자나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반공적인 대응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시위와 충돌이 발생하면서 경찰과 민중 사이에 갈등이 커졌습니다.

      경찰 3.1절 발포사건은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3.1운동 참여자들이 위례산성에서 촛불집회를 하던 중 경찰이 발포하여 많은 시민들이 사망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 사건의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5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경찰과 민중 사이의 갈등이 극심해져서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경찰 3.1절 발포사건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경찰과 민중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어 4.3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4.3 사건을 이해하려면 경찰 3.1절 발포사건을 포함하여 제주도의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경찰 3.1절 발포사건은 1948년 3월 1일 대한민국 경찰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3.1절 독립운동 시위를 진압하던 중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당시 경찰은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많은 시민들이 사망하였고, 이 사건은 제주 4.3사건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5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정부 민중항쟁으로, 많은 민간인과 경찰, 군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국군과 경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진압과 처단을 가하였으며, 경찰 3.1절 발포사건과 같이 민간인 대상의 무력진압이 사건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즉, 제주 4.3사건과 경찰 3.1절 발포사건은 모두 대한민국 정부의 무력진압과 폭력으로 인해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어, 제주 4.3사건과 연관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