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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란 이라크에 전쟁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1980년대 이란 이라크는 전면전에 돌입하여 국지전 적이고 지루한 전쟁을 오랫동안 이끌어 갔는데 이들이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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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쟁의 원인

    이란-이라크 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수로와 호르무즈 해협의 3개 도시를 둘러싼 영유권 갈등 때문이었다. 당시 양국 사이에는 알제협정(국경협정)이 맺어져 있었는데, 이는 1975년 알제리의 알제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상회담 때 이란의 팔레비왕과 이라크의 혁명위원회 부위원장 사담 후세인이 체결한 협정이었다. 이는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지배권과 호르무즈 해협에 위치하는 3개 도서의 지배권을 이라크가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979년 이란은 호메이니가 혁명에 성공하자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이라크에 압력을 가해 샤트 알 아랍 수로에 대해서는 가항수로(可航水路)의 중간선을 국경으로 하고, 3개 도서에 대해서도 사실상 이를 장악하는 행동에 나섬으로써 양국 간에 국경분쟁이 빈발하였다. 그러다 이란이 혁명의 후유증으로 내부적 불안을 겪고 있는 틈을 타서 이라크가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종교적·종족적·정치적인 요인의 복합적 작용

    이처럼 전쟁은 표면적으론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수로와 호르무즈 해협의 3개 도시를 둘러싼 영유권 갈등에서 야기됐지만 이면에는 종교적·종족적·정치적인 요인이 얽혀 있었다. 즉, 이란은 전체 인구의 93%가 시아파이며,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둔 이라크의 경우 시아파가 인구의 50%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수니파가 정권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정체제가 붕괴되고 호메이니 혁명정권이 수립됐는데, 급진적 범이슬람주의를 주창하는 호메이니의 혁명 이데올로기는 세속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바스당 이데올로기를 견지하고 있던 후세인의 정권에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다.

    호메이니의 혁명 이데올로기는 이라크인·시아파 이슬람교도·수니파 이슬람교도·쿠르드족·이라크 거주 이란인 등 누구를 막론하고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키고 구원하기 위해 통일된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하고 있었다. 호메이니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면서 이라크 내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에게 자신의 혁명이데올로기를 전파하여 반체제 활동을 강화시킴으로써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즉, 호메이니는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에게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현 권력체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따라서 후세인으로서는 이러한 호메이니의 위협적 노선과 행동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며, 따라서 호메이니의 혁명 이데올로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이란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란-이라크 전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란ㆍ이라크전쟁은 1980년에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국경을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입니다. 1988년 8월에 정전에 합의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이라크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란과 이라크는 같은 코카서스계 인종이면서도 각각 북방계(동방계, 이란인)와 남방계(셈, 아랍인)로 나누어집니다. 게다가 같은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이란은 시아파, 이라크는 수니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9년 이란에서 시아파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이라크 내의 시아파는 '다와'당을 결성하였고 다른 이슬람 국가로 혁명의 열기가 확산됩니다. 이 때 이라크에 집권하고 있던 '바트'당의 후세인은 다와당을 큰 위협으로 느끼고 지난 1975년 이란의 팔레비 정권과 맺었던 국경 협정을 파기합니다. 그리고 이란의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의 제 1 수출지로 이라크를 꼽았고, 이라크의 후세인은 혁명 전 후 혼란한 이란을 초전박살 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사행동의 주 목표는 샤트알아랍 강의 획득 및 이란의 혁명적 정권의 타도였습니다. 이라크는 선전포고없이 공격했지만, 그들은 전쟁을 진척시키지 못하고 이란에게 격퇴당합니다. UN 안보리의 휴전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1988년 8월 20일까지 백만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전쟁을 계속하고, 2003년에 마지막 포로가 교환되었습니다. 전쟁은 지역 및 국제 정세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출처 - 지식백과 이라 이라크전쟁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인은 샤트 알 아랍 수로와 호르무즈 해협의 3개 도시를 둘러싼 영유권 갈등때문으로 당시 양국 사이에는 알제협정이 맺어져있었는데 이는 1975년 알제리의 알제에서 열린 석유수출기구 정상회담 때 이란의 팔레비왕과 이라크의 혁명위원회 부위원장 사담 후세인이 체결한 협정으로 이는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지배권과 호르무즈 해협에 위치하는 3개 도서의 지배권을 이라크가 갖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이란은 호메이니가 혁명에 성공자하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이라크에 압력을 가해 샤트 알 아랍 수로에 대해서는 가항수로의 중간선을 국경으로 하고 3개 도서에 대해서도 사실상 이를 장악하는 행동에 나섬으로 양국 간에 국경분쟁이 빈발하였는데 그러다 이란이 혁명의 후유증으로 내부적 불안을 겪고 있는 틈을 타 이라크가 선제 공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 더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는 정치적 측면의 갈등에 있었는데, 이란 이라크간의 정치적 갈등은 이란에서 팔레비 왕정체제가 붕괴되고 호메이니 혁명정권이 - 수립되면서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분적으로 이란과 이라크 의 전쟁 원인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민족과 종교 그리고 국경에 대한 영유권을 놓고

    대립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족과 종교 그리고 국경 수로에 대한 영유권 등을 놓고 이란의 중동에 대한 이슬람 혁명 파급기도와 팔레비 왕조의 붕괴로 중동 제일의 군사강국 지위를 점한 이라크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 또한 주요 원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