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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

미국과 베트남 전쟁은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했었던 이유도 있었나요?

미국에서 반전 시위할 때 쓴 글귀를 보면

we won't fight another rich man's war이라고 쓰여있는데요.

우리는 부자들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어떤 배경이 있었나요?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으려 전쟁했던 걸로 아는데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했었던 전쟁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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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 제 1차 베트남 전쟁(1945∼1956)
    -2차 세계 대전의 종결에서 제네바 협정까지

    1945년 9월 2일,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지 채 2개월도 되지 않아서 베트남 독립동맹의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자신들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했고, 베트남을 단지 프랑스 연합내의 독립주로 여기려하였다. 1946년 프랑스군과 베트남 독립동맹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전쟁은 1945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7년 가까이 명분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지칠대로 지친 프랑스의 수상 라니엘(Laniel)이 1953년 의회에서 '인도차이나 사태의 협상 용의'를 표명함으로써 협상에 의해 해결하려고 한 바 있었고, 월맹의 호지명도 1953년 11월에 '휴전에 관한 협상을 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표명하였다. 한편,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프랑스와 베트남의 독립동맹 사이의 문제가 상정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협상을 타결하였다. 즉, 프랑스군과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는 베트남인들은 북위 17。선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베트남 독립동맹군은 북위 17。선 북쪽으로 이동시킨 다음, 북위 17。선을 비무장지역(DMZ)으로 둘러싸인 군사분계선으로 정한다고 정하였다. 또한 남·북쪽 베트남을 인민에 의해 선출된 하나의 정부 아래 통합할 목적으로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1956년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다.

    제네바 회의의 합의에 따라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베트남 독립동맹은 베트남 북반구를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를 북베트남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비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베트남 남반부는 남베트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북베트남은 남북 양쪽에 이미 만들어놓은 광범위한 정치 조직에 힘입어 이 선거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한 당시의 호지명은 남·북 베트남은 물론 인도차이나 전역을 통틀어 유일한 존경받는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북베트남의 승리를 더욱 확실시 해주었다. 그러나 휴전협상의 동안에 미국의 전폭적 지지에 의해 남베트남의 총리가 된 고 딘 디엠(Ngo Dinh Diem)은 "공산주의 사회는 선거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선거는 무의미하다" 고 하면서 총선을 거부하였는데 이는 미국의 의사였다. 미국은 베트남이 반공기로서 남아 있기를 원했던 것이며, 선거를 통하여 합법적으로 공산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2. 제 2차 베트남 전쟁(1956∼1972)

    -제네바 협정 이후부터 파리 협정까지

    북베트남은 총선 실시 기피를 제네바 협정의 파기이며 베트남 인민에 대한 중대한 배신행위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총선이 거부되자 베트남내의 공산세력은 정부쪽 인사들을 테러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총선거부는 베트남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때문에 고 딘 디엠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보다 우월한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디엠은 정통성이 취약하였다. 북의 호지명은 독립을 위하여 싸웠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8년간의 반식민 대불항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디에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배하에서 성장(省長), 내무상(內務相) 등 관리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한때 반불운동을 하기는 하였으나 뚜렷한 공적이 없었다. 또한 그는 자신에 대한 존경과 복종만을 요구함으로써 권위인식이 대단하였고, 주요 요직에 친인척들을 중용함으로써 인사정책을 문란시켰으며, 토지를 불공정하게 분배함으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이렇듯 디엠 정권에의 국민의 불평불만이 높아지면서 마침내 1963년 11월 민(Duong Van Minh)장군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쿠데타로 디엠 정부는 전복되었고 디엠 대통령과 그의 동생 누(Ngo Dinh Nhu)는 피살되었다.

    미국정부는 이미 그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으며 사전에 쿠데타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다. 디엠이 죽은 뒤 각종 정치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정치가 혼란스러웠고, 여러번의 쿠데타와 정권교체가 일어나는 등 남베트남은 정치적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호지명은 이런 호기를 이용하여 전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1964년부터 정규군을 월남에 파견하면서 공세를 취하였다. 그 해 8월 베트남의 초계정 수척이 통킹 만에서 미군 구축함 매독스호에 사격을 가했다는 보고를 들은 존순 대통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해군 비행기들에게 북베트남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국 의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게 베트남공격을 찬성하였으며 1965년 이후 미국의 개입으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 취임하면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우방을 지원하고 어떠한 적과도 대결"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1961년 5월 부통령 존슨을 상황 파악을 위하여 남베트남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남베트남 정부에 군대의 증강과 경제 원조를 약속하였으나 미 지상군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VC(베트콩)들의 테러가 점점 심해지자 Diem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고 1961년 말에는 미군의 개입을 증가시켰다. 1962년 2월 8일 미국은 MAAG를 재월 미 군사원조 사령부(MACV)로 바꾸며 이제 고문단의 수준이 아니라 작전지휘 사령부로 승격시켰다. 이것은 케네디로서는 자유세계의 리더로서 공산주의 팽창에 단호히 대응하려 하였고 남베트남을 이러한 미국 결의의 분수령이 되는 시험장으로 보았기에 쿠바와 베를린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무기가 보급되었고 월남군의 사기는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베트남 내에서는 내란이 끊이지 않았다. 1960년을 기점으로 군사 쿠데타가 계속되었고 Diem정권의 상징인 독림궁이 폭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1962년 2월 전략촌 계획을 수행하였는데 이것은 농촌지역에서 물(대중)과 물고기(VC)를 분리시키기 위해 농촌을 새롭게 편성하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성공을 거두어 1963년에는 8,100여 개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더 많은 전략촌을 세우기 위한 省끼리의 경쟁으로 입지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빨리 세우려 주민을 강요하게 되었고 이것은 불신을 낳게 되어 1964년 2월에 이 계획은 중지되었다. 1963년 초파일에 국기 게양 문제 때문에 불교도의 시위가 시작되어 5월 30일에는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어 분신 자살하는 자도 늘어났다. 11월의 군사 쿠데타로 Diem이 사망하고 1967년 9월 Thieu가 대통령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10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1964년 북베트남에서는 이제 게릴라군이 아니라 정규군을 파병하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무기로 월맹의 사기가 높아졌고 전력도 증강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Ton Kin만 사건이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월맹이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소련이 지원해 주리라 기대했고, VC의 게릴라로는 더 이상 전쟁의 진전이 없는 데다 총공세를 늦추었다가는 미국의 지원으로 남베트남 정부가 안정이 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1963년 케네디의 암살로 존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이제는 점진적 확전압력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즉 조금씩 확전하면서 협상 신호를 하고 만약 협상을 거부하면 더 확전하여 월맹에 압력을 가하자는 것이었다.(아직까지 북폭은 반대) 이것은 월맹을 겁주어서 미국에게는 절대 이길 수 없으니 단념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너무 월맹을 만만하게 본 것으로 이후부터 월맹은 미국인과 미국시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1964년 5월 9일 미국은 자유우방에게 지원을 호소하게 되고 우리 나라를 비롯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에서 군사지원을 하였다. 이제 미국은 손을 떼고 싶으나 패배는 싫고, 프랑스의 지원이 필요하나 예전의 사건을 생각하면 그것을 요구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1965년 2월 7일 미 고문단의 숙소를 VC가 공격하자 미국은 드디어 북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Rolling Thunder의 작전도 효과가 미약하여 3월 8일 드디어 지상군을 개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미국은 기울어가는 전세를 만회하였으나 군비증강을 계속해야 하고 장기적인 소모전이 불가피한, 지지는 않으나 승리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는 중에서 미국 내에서는 반전운동이 격렬히 벌어지고 있었다.

    북베트남은 이제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계속적인 군사적 압력을 가하고 도시에서는 정치투쟁을 강화하며 미국의 반전운동을 부추기는 선전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남베트남은 엄청난 시위로 혼란을 거치다 1967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Tieu가 당선되자 안정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1968년 1월 30일 월맹은 테트(음력설)에 대규모의 기습공격을 하여 남베트남의 주요도시를 공격했다. 이 때 위에 시에서 수 주일동안 격돌하였는데 여기서 NLF은 3만 3청명의 병사가 전사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VC병사들은 전투에서 너무나 많이 죽어 1968년 이후로 남베트남에서 활동한 잔군의 대다수는 실제로는 월남에 잠입한 월맹 군사들이었다. 북베트남이 자신들을 후원하기 위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총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세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효과를 거두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국인들에게 미국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미군은 결코 남베트남의 반군세력을 진압할 수 없으며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미국 내에서의 반전운동은 더욱 고조되어 평화행진, 시위 그리고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표현되었다. 갈수록 많은 수의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미국의 전쟁노력이 성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혹자는 베트남 내전이라고 해석하는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Westmoreland장군은 테트 공세 이후 전쟁을 확대하기 위해 군대의 증파를 요청했지만 미국의 여론동향은 전쟁의 '축소' 쪽으로 움직였다. 1968년 3월 31일, 존슨 대통령은 텔레비전 연설에서 북위 20。선 이북에서는 폭격은 중지될 것이면 자신은 가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하노이는 반군의 활동을 축소함으로써 미국의 폭격 축소에 응답했고, 10월 존슨은 폭격의 완전 중지를 명령했다. 그 사이에 미국과 하노이는 파리에서 예비 평화회담을 시작하기 동의했고, 크레이턴 에이브러햄 장군이 월남 주둔 미군의 신임사령관이 되었다. 1969년 동안 남베트남에서의 전투는 산발적이고 제한적으로 전개되었고 북베트남군의 침투도 가을이 끝날 무렵까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6월 들어 닉슨 대통령과 티우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 일차로 2만 5천명의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 당시 베트남에서 54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은 월남이 미국의 무기·장비·공군력 지원과 경제원조를 충분하게 받으면서 점차로 자주국방 태세를 확립하도록 '베트남화'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미군 야전사령관들은 사상자가 '절대 최소'로 줄어들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실제로 미군의 피해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파리에서의 평화회담은 지지부진했으나 남베트남은 마침내 자신들이 NLF 및 북베트남 측과 협상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1970년 봄, 미군과 남베트남의 정부군이 북베트남의 요충지와 부대 집결지역을 파괴하기 위해 캄보디아의 접경지구에 침입하면서 베트남전쟁은 재개되었다. 미군 비행기들은 상당수의 북베트남 군대가 친공산주의 파테트 라오(라오스 애국전선)과 연합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브양트안 정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라오스 북부지역을 폭격했다. 호치민로는 언제나 B-52 폭격기들의 표적이었다. 전투가 캄보디아로 확산되자 미국에서는 새로운 반전시위와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 남베트남 주둔 미국 병력은 33만 5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베트남으로부터의 미군의 점진적 철수는 이전에 공표한대로 진행되었으나, 평화회담은 여전히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1971년 말 남베트남군은 여전히 미국 공군의 지원에 의존했지만 지상에서의 모든 전투의 작전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남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은 약 16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1972년 3월 북베트남군은 비무장 지대로 들어와 쾅트리 성(省)을 점령했다. 닉슨 대통령은 하이퐁을 비롯한 북베트남에 대한 집중적인 폭격을 퍼부을 것을 명령했다. 평화회담은 7월에 다시 시작되었으나 12월 중순 양축이 각각 상대방에게 약속을 위반했다고 비난함으로써 대화가 중단되었다. 하노이와 북베트남의 도시들은 그 후 11일 동안 미군의 집중 폭격을 받았다. 파리에서는 다시 회담이 시작되었고 1973년 1월 27일 마침내 남베트남 공산주의 세력, 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졌다.

    3. 제 3차 베트남 전쟁

    -평화 협정 이후부터 남베트남 항복까지

    그러나 정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계속되었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각각 상대방이 정전협정을 수없이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수는 과거 어느 때에 못지 않게 많았다. 1974년 남베트남은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는 변경지역을 포기하기 시작했고, 베트콩은 여러 지방 도시들을 점령했다. 1975년 1월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북베트남이 푸오클롱 성을 공격하자 남베트남 정부군은 후퇴했다. 예상치 못하던 남베트남 정부군의 푸오클롱 성의 포기는 북베트남군으로 하여금 남베트남둁에 대한 총공세를 결행할수 있는 때가 왔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에 북베트남 군은 중부 고원지대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고, 남베트남 정부군은 3월 이 지역을 포기했다. 그리고 나서 티우 대통령은 쾅트리·위에 시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남베트남군은 해안 도시들을 하나씩 포기하기 시작하더니 4월초에는 남베트남의 북반부를 북베트남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남베트남 정부군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 때까지 남아 있던 미국인들은 베트남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과 함께 비행기나 배를 타고 탈출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의 뒤를 이은 두옹반민의 남베트남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사이공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점령되었다. 남베트남에는 군사정부가 세워졌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 사이공은 호치민 시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