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원인은?
안녕하세요? 박정희 시대때 차지철과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의 오른 팔 왼팔 로 불렸던 최측근들이었는데요 이 둘의 갈등원인은 어떻게 되서 비극으로 끝났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재규는 닉슨 독트린에 저항하는 박정희의 자주국방 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실제로 10.26 사건 재판 뒤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자주국방 실현에 대해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파벌 싸움 역시 김재규가 박 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게 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김재규는 장교들로부터 "자존심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김재규는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과 견원지간이었는데, 시해가 발생한 10월 26일 오전에도 차지철과 김재규는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충남 당진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송신소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 중 당진송신소는 대북방송 송신 기능 때문에 김재규가 있던 중정이 관리하던 보안시설이었습니다.
김재규로서는 준공식에 참석할 명분이 있던 것인데,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정보부장까지 서울을 비우면 어쩌란 말입니까? 김 부장은 참석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세요"라며 김재규에게 면박을 줬다고 합니다.과열된 파벌싸움이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게 만든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대통령과 각 분야들의 인사들의 연결 통로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비서실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과 직접 면담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까지 통제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누적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박정희는 측근들의 충성 경쟁을 유도하는 용인술 때문에 두 사람은 정보 경쟁도 있었습니다.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정보 제공을 위해 사설 정보 기구까지 설치하여 정보 수집을 하고, 이 때문에 박정희는 차지철을 김재규보다 더 신뢰했습니다. 게다가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의 정보 능력을 폄하하기가 일쑤였으며, 김재규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습니다. 김재규와 갈등은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나자 두 사람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러 10.26사태가 일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