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국시대가 길었던 이유는 무엇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일본은 수백년 내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전쟁과 기아로 허덕이고 있던 전국시대에 왜이리도 전쟁의 기간이 길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03년에 정이대장군에 취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천하패권을 확립한 1615년부터 1867년 11월 9일의 대정봉환 때까지 약 252년 간 지속되었다. 전란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이전의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 전국시대와는 달리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큰 혼란이나 전쟁 없이 평화가 지속된 안정기였다. 또한 일본 역사 전체 기준으로 볼 때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사실상 반(半)중앙집권 시대이라는 것. 또한 이 시기부터 전국시대까지 변방이었던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됐고, 홋카이도와 류큐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했으며 특히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의 중심지는 기존의 교토, 오사카 중심의 긴키 지역에서 현대의 도쿄 중심의 간토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에도 시대 중기인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에는 경제 호황기로 국부를 축적하고 국력도 신장해 소위 겐로쿠 시대를 맞았다. 겐로쿠 시대는 일본 막부 최대의 전성기로 이 기간동안 상업이 흥업하고 오늘날의 선물거래와 같은 쌀 선물거래가 등장하고, 이러한것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카부나카마(株仲間)를 형성하기도 했다.
겐로쿠 시대가 끝날무렵, 방탕해진 재정을 개혁하고자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필두로 享保の改革(きょうほうのかいかく, 교호년의 개혁)을 실시한다. 이를 통해 막부의 재정지출을 줄이며 세금의 증세와 치수사업, 신전개발(新田開発)을 실시했다. 또한 급격하게 올라간 쌀값을 견제하고자 금 비율이 낮은 겐분코방(元文小判,げんぶんこばん)을 제조해 의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에도시대는 중흥의 시기를 열었다.
이후 타누마 시대(1751~1789)에는 긴축재정을 버리고 상업자본의 이용과 적극적인 정책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부패와 뇌물의 시대로 일컬어지며 농민들의 반란(잇키)가 많아졌다. 계속적으로 재해, 기아가 속출하고, 1772년 에도에서 화재가 발생해 약 2만명 가량의 인명피해를 입자 결국 마츠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쥬(老中)가 되어 쌀의 선물거래 규제 완화, 귀농민 보호, 술 생산량 제한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寛政の改革(かんせいのかいかく, 간세이년의 개혁) 을 실시했다. 이것으로 다시 막부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텐보(1841~1843)년에 대기근, 반란, 소동, 모리슨호 사건등이 겹쳐 다시 막부가 기울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로쥬 미즈노 타다쿠니는 위의 교호년의 개혁과 간세이년의 개혁에 따라서 개혁을 실시했다. 주로 탐관오리를 귀양시키거나,가부키쵸 일대의 오락가를 닫아버림으로서 민간의 낭비를 없애버리는식이었다. 또한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걸 듣고는 서양식 포술을 도입하게하고 군사 체제를 서양식으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그외에 선물시장에서 쌀 시세를 혼란시키게 하고있던 카부나카마를 추방시켰으며, 파산한 다이묘들을 위해 그들이 가지고있던 빚을 무이자로 해주고 원본은 20년안에 갚으면 된다는식으로 재정을 안정시켰다.
결국 1853/54년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개항한 뒤 격동의 동란기에 빠져 사쿠라다 문 밖의 변(櫻田門外の變)이 일어나고 번들은 대놓고 막부의 말을 안 들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등 사실상 통치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사쓰마, 조슈 등의 토막(討幕)파 번들과의 투쟁에서 패배하고, 1867년 대정봉환으로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소멸, 이듬해 무진전쟁(보신(戊辰)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에도 막부가 소멸한 1868년은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明治) 시대의 시작이라 하여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