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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밀잠자리170
대찬밀잠자리17023.06.03

발해도 우리나라 역사로 보고있나요?

예전에 배우던 역사책에서 발해사가 크게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던데 현재 역사학계에서 발해가 우리나라의 역사로 인정하고 있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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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 건국이 고구려 멸망 후 유민 부흥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발해의 지배계급이 고구려 출신이었던 것,


    그리고 발해가 멸망되고 발해유민이 고려에 흡수되었다는 것


    이런 것이 같은 민족의 국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동북아역사재단의 자료로 근거가 되는 문단입니다.



    발해가 한국사인 이유는 우선 발해의 건국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발해 건국은 고구려 멸망 후 유민부흥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요동(遼東) 지역은 7세기 이후 당나라의 패권정치에 대한 주변 민족 저항의 구심점이었다. 발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은 영주(營州 : 현재 중국의 조양시) 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유민을 결집하여 동모산(東牟山 : 현재 중국의 돈화)으로 이동하여 진(震/振)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진국왕에 올랐다. 이것이 바로 발해가 어느 나라에도 종속되지 않았던 독립국가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한 점은 발해가 사용한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 하늘의 자손임과 발해왕이 황제임을 강조하였던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왕은 외교적으로도 주변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신라에게서는 발해 건국에 걸맞는 신라 관직을 받았으며, 《삼국사기》를 통해 보면, 신라 원성왕(元聖王)과 헌덕왕(憲德王) 때 북국(北國)인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우리는 발해와 신라를 한국사 속에 남북국사로 설정하고 있는데, 위 기록은 바로 그 원천근거이다. 《고려사》에는 926년 발해 멸망을 전후하여 근 2백 여 년 간의 발해유민의 고려망명 기록이 실려 있다. 발해와 고려의 친연성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후 남북국사 인식은 조선시대 실학자인 유득공(柳得恭)에 의해 이론적 틀을 갖추고 한국사의 당당한 주체로서 자리매김하였고 발해가 신라와 함께 한국사의 주체임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를 남기고 남북국 시대라고 한 이래 이러한 흐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강하게 인정하는 분위기는 사실 중국의 동북공정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보니, 이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려는 의도도 한몫 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주축이 되서 이뤄진 국가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지만 당나라를 끌여들여 이룬 성과로 발해를 축소 왜곡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려를 세운 주축세력이 발해인들이 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네, 그렇습니다. 발해가 왜에 보낸 국서에 '고려국왕' 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점, 당의 3성 6부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명칭, 운영에 있어서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우리나라 역사(고구려를 계승한 우리나라 역사)로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