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은 어떻게 종3품의 대호군까지 오르게 됐나요?
장영실은 기녀였던 어머니의를 따라서 노비의 신분이라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관직인 종3품의 대호군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승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에게 의논하기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디 원(元)나라 소항주(蘇杭州)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하여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다.
장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 글은 장영실의 출생과 그가 관직에 등용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기록된 「세종장헌대왕실록」권 61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세종 14년인 1432년네 대대적인 천문·기상의기 제작사업이 세종의 명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장영실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였던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는 한편 여러 가지 천문의기 제작을 감독하였고 그로부터 1년이 채 안된 세종 15년(1433)에 장영실은 그 능력을 인정 받아 5품이던 상의원 별좌에서 4품인 호군(護軍: 조선시대 5위의 정 4품 무관)에 오르는 영예를 안기에 이르렀다고전해집니다.
출처 - 지식백과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관노 신분이었지만 과학적 재능이 비상한 인물로 인정받아 궁중 기술자로 종사하였습니다.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라는 관직을 주려했던 세종은 이 문제를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와 의존하였습니다. 이조판서 허조는 반대했고, 병조판서 조말생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다른 대신들을 불러 이 문제를 상의하여 유정현 대신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고 하자 곧바로 임명했답니다. 장영실이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세종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고자 정4품 벼슬인 호군의 관직을 주려했는데 이때도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때 황희가 찬성하자 장영실에게 호군이라는 관직을 내렸다고 합니다.
노비 신분에서 대호군에 이르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지만 세종은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과정을 통하여 그의 공로로 관직을 허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