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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큰고니27
밝은큰고니2723.11.26

광해군을 폭군이라고 할 만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조선시대의 폭군으로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는데요. 연산군은 여러 기록으로 봐도 폭군으로 불릴 만하지만, 광해군은 정적에 의해 제거된 것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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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방해가 되었던 신하들, 동복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가두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해 세운 명분 중의 하나가 폐모살제라 불리는 친족에 대한 무자비한 견제였는데 형인 임해군을 독살, 조카인 능창군과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보낸뒤 사실상 목숨을 빼앗았으며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강등하여 서궐인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주장인데,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을 죽이도록 광해군이 직접 교사했다는 사료는 없습니다.

    사실 실록에 등장하는 영창대군 살해 진상은 때에 따라 다르며, 영창대군 사사에 연루된 인사들 중 영창대군 살해에 가담했던 정항 등 상당수는 훗날 인조반정 공신들에 의해 복권됩니다.

    어느쪽이든 당시 정황상 심증으로 광해군으 그랬을 거라 취급하는 것이며 또한 반정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처럼 몰아간 면도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유배지의 현지 관리가 왕명과 무관하게 임의 살해한 것으로 기록, 당시 대북의 수장이던 기자헌의 소행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영창대군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 부사 정항 등 의심자들에 대해 딱히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것이 광해군이 내심 이들의 행위를 두둔했다는 것이 근거로 꼽힙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반정의 구실은 "폐모살제"와 중립외교에 따른 명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 특히 인목대비를 폐위라고 영창대군을 죽인 시실이 가장 큰 허물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에 대해서는 사실 많은 엇갈린 평가가 존재 합니다. 여러 중립 외교나 기타 좋은 업적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아버지인 선조의 계비(두번째 왕비) 인목대비를 폐모시키고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폐륜을 범하기도 했던 것 사실 입니다. 서인과 남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폐륜 행위를 문제삼아 인조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켰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조선 15대 왕으로 임진왜란 이후 부국강병에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습니다. 전쟁 중에는 왕세자로 분조를 이끌어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을 독려하였으나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광해군은 대북파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뒤 영참대군을 폐서인하고 사사시켰으며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킵니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서인주도의 반정으로 1623년 폐위를 당하게 됩니다. 펴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기게 됩니다.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와 선혜청 통한 빈민구제를 행하고 궁들의 복원을 이루는 등 업적이 많았음에도 폭군으로 몰아간 것은 정치적 갈등이 크게 작용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