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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는 왜 법가에 저항하여 분서갱유로이어지게되나요?

유학자들은 진시황의 법가적인 사상에 반발하고 저항해서 이후 분서갱유의 사건이 이어지게 되는데 당시 유학자들이 진시황이 밀어붙이던 법가적인 사상에 반발하고 저항한 근본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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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건제적인 질서를 옹호하던 유가가 군현제를 철저히 시행하려 하던 법가 통치에 저항한 시도로 보입니다.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애초에 둘이 비슷했으면 굳이 구분하지 않았겠죠?

      한참 후대에 법가가 멸망 한 뒤에는

      법가의 사상 중 일부가 유가에 혼합되기도 했지만

      그건 법가가 이미 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고

      법가, 유가 둘다 있던 시절에는

      서로 라이벌 수준을 넘어서

      아예 서로 다른 나라를 영역으로 삼고 전쟁을 벌였던 사이 입니다

      즉, 당시 유가에게 법가 사상을 받아 들이란 말은

      한국인에게 독도를 일본에게 넘기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던 거죠

      거기다 진시황이 도형량, 문자 등등 많은 분야의 통일을

      자기가 정한거 말고는 전부 지우는 방식으로 시도한 만큼

      유가가 저항 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법가가 아니라서 지워졌을 확률이 높습니다

      유가가 그나마 영향력이 강했으니까 진시황상대로 반항이라도 할 수 있었던 거지

      유가 하나 때문에 분서갱유가 일어난건 아니란 거죠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시황이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법가 사상에 기반하여 군현제와 강력한 중앙 집권과 사상 통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봉건제를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여겼으며, 진시황의 정책에 반발하였습니다. 결국 460여명의 유학자들이 생매장 당하고 서책을 소각하는 분서갱유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