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담의 난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비담은 선덕여왕때 인물로 김유신과 대척되는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어떤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는지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마지막 해에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일으킨 반란입니다.
647년(선덕여왕 16) 1월 상대등 비담이 염종(廉宗) 등과 더불어 선덕여왕(善德女王)에서 진덕여왕(眞德女王)으로의 왕위계승에 반감을 갖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삼국사기(三國史記)』김유신전(金庾信傳)에 특히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담은 그 출신을 잘 알 수 없으나 645년(선덕여왕 14) 11월에 귀족회의(貴族會議)의 의장인 상대등에 올랐던 것을 보면 본래 진골(眞骨) 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담이 상대등에 오른지 약 1년 남짓 지난 뒤에 염종 등과 함께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女主不能善理)’는 것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결과는
비담·염종 등 반란군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군(王軍: 선덕여왕 옹위 군사로서 김유신·김춘추 편의 군사)은 월성(月城)에 진을 치고 10일간이나 서로 공수(攻守)했는데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이에 비담은 반란군에게 “별이 떨어지는 곳에 반드시 피를 흘린다 했으니 이것은 여왕이 패할 징조이다”라고 독려하였다. 기세가 오른 반란군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땅을 진동할 정도였다. 그러자 김유신은 오히려 ‘길흉(吉凶)은 정해져 있지 않고 오직 사람이 하기에 따른 것입니다’라며 왕을 안심시키고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기고 연(鳶)에 실어날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이 하였다. 그리고는 이튿날 아침에 “어젯밤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선전하였다. 또한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드리며 ‘하늘의 도는 양이 강하고 음이 약하지만, 사람의 도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그것이 바뀌면 난이 되는 것입니다. 비담 등이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며 아래서 위를 범하니, 이것은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령이 함께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축원(祝願)한 뒤, 장졸(將卒)을 독려해 반란군을 공격하였다. 마침내 비담 등이 패해 달아나자 추격해 진압하고 주모자의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이로써 선덕여왕에서 진덕여왕으로 이어지는 성골(聖骨)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 세력은 후퇴하고 김유신·김춘추(金春秋) 등 율령국가(律令國家)를 지향하는 세력이 승리해 장차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전제 왕조가 성립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담의 난 [毗曇─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45년 상대등에 취임한 비담은 647년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염종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에 대비하여 선덕여왕 12년 당에 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당은 신라에 세 가지 방책을 제시하는 한편, 고구려와 백제에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신라에서는 당이 요구한 여왕폐위 문제를 중심으로 여왕폐위파와 지지파가 대립하게 되었으나, 여왕 지지파 김유신은 선덕여왕 13년 9월 백제를 공격하여 실지를 회복하였다. 또한 신라 공격중지 명령에 대해 고구려가 실지 반환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이를 무시하였으므로 당은 태종 때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이 때에 신라는 군사 3만 명을 동원하여 당을 도왔으나, 그 틈에 백제에게 7성을 탈취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의 고구려 공격이 시작된 645년에 왜국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나 6세기 중엽 이후 4대에 걸쳐 권력을 휘두르던 가문이 몰락하였습니다. 이를 타이카노카이신이라고 합니다. 쿠데타 직후 새로 성립한 개신정부는 왜국에 와 있던 고구려 사신에게는 양국간의 우호관계의 강화를 요구하였고, 백제사신에게는 신라로부터 김해지역을 확보하고 교역물을 확실히 보내도록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개신정부는 대화 2년(646)에는 신라에 타카무쿠노쿠로마로를 파견하여 양국관계를 보장할 수 있는 인물을 파견할 것을 요구하면서 신라와 외교관계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당시 신라에서는 이찬 비담이 상대등으로 임명되는 등 여왕폐위파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여왕지지파 김춘추는 고향현리로부터 왜국의 쿠데타에 대해 듣고, 왜국의 새로운 정부와 교섭을 통해 양국관계를 개선해 보고자 647년 왜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김춘추의 왜국 체재 중에 신라에서는 비담의 난이 일어나 선덕여왕이 사망하는 위기가 있었으나, 김유신이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하여 여왕지지파의 세력은 강화되었습니다. 김춘추는 왜국과의 관계개선에 성공하고 귀국하여 진덕여왕을 보좌하게 되었습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 2년부터는 대당 청병외교를 추진하면서, 중국 의관의 착용, 당의 연호 사용, 하정의례 시작 등 친당정책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당은 태종 19년 이후 21년·22년 모두 3차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649년 태종은 사망합니다. 신라는 진덕여왕 원년·2년 계속되는 백제군대의 침공을 격퇴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는 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진덕여왕 2년에는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국의 국서를 받아다가 당에 전달해 주었습니다. 또한 진덕여왕 3년에는 선덕여왕 13년에 당에 청병사로 파견되어 당의 고구려원정 때 길 안내를 한 적이 있던, 관리를 왜국에 파견하여 당·신라·왜국으로 이어지는 군사동맹을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에 모두 학문승을 파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신정부는 친백제적인 외교정책을 수정하여 삼국에 대한 균형외교를 유지하고자 하였을 뿐 신라와의 군사동맹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