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투를 자르고 한복을 입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일반 남자들은
상투를 트고 있고, 한복을 입고 있습니다.
현재의 시각에서는 불편해 보이고 관리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과거 상투를 자르고 한복을 언제부터 입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화기(開,化,期)는 1876년의 강화도 조약 후, 한국에서 서양 문물이 유입되어 종래의 전근대적 사회 질서 및 풍습이 타파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근대적 사회로 개혁되어 가던 시기를 말합니다.
우리나라 개화기때의 생활 모습은 한복 대신 양복, 양장을 입게 되었고, 상투를 잘랐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화기(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 정도) 이후에 점점 한복은 양복으로부터 밀렸다고 합니다. 공업화되고 도시화되면서 농경사회에 맞던 한복보다는 직장을 다니고 할때 더 실용적인 양복으로 점점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섬유산업이 발달하고 산업혁명에 의해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옷이 좀더 싸지고 해서 더 가속화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단발령(斷髮令)은 김홍집 내각이 고종 32년인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에 공포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고종의 칙령입니다. 서양인, 일본인들의 단발 건의 이후 당시 내무부대신 유길준 등의 상주로 전격 단행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하였는데, 조선 개국 504년 11월 15일 건양원년(建陽元年) 1월 1일을 기하여 양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일본의 강요로 고종이 먼저 서양식으로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內部大臣) 유길준(兪吉濬)은 고시(告示)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였다.
한국에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것이다.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더구나 김홍집 내각은 이른바 친일내각이라는 소리를 듣는 형편이었으므로, 음력폐지·단발령 등은 모두 배후에서 일인(日人)이 조종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배일적(排日的)이 된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국민은 더욱 분개하여 단발령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의병을 일으켜서 정부시책에 대항하였다. 정부에서는 친위대(親衛隊)를 파견하여 의병활동을 진압시켰으나,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김홍집도 피살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