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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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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생애와 주요 업적이 궁금합니다.

바사 왕조의 스웨덴 제 6대 국왕이자 핀란드의 대공이었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북방의 사자, 황금의 왕이라는 별명이 있었다는데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생애와 주요 업적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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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구스타프2세의 생애와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중에 스웨덴 국왕 칼 9세가 되는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과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크리스티나의 맏아들로, 스웨덴의 독립 시조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손자였으며 외가로는 덴마크 올렌보르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칼 9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중 뇌졸중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16세의 어린 나이에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고 합니다. 국가 개혁에 착수하는 동시에, 30년 전쟁 중반부터 참전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여 위기에 몰렸던 개신교 세력을 구원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632년 뤼첸 전투에서 피콜로미니의 기병 돌격에 자신이 신임하던 청색 연대가 붕괴되고 스웨덴군이 위기에 몰리자 이를 수습하다가 피콜로미니의 기병에 의해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전투 자체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오판으로 스웨덴군이 승리했지만 국왕과 정예병을 상당수 잃어버린 스웨덴의 손실은 뼈아팠습니다. 아들을 남기지 못해 딸이 크리스티나 여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군사에서 30년 전쟁에서 여러 혁신적인 전술을 내놓아 활약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때문에 일명 근대전의 아버지 라는 별명이 잘 알려져 있다. 클라우제비츠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여겼고, 조지 S. 패튼 등도 그러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잦은 정복 전쟁을 통해 스웨덴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사촌형 지그문트 3세와의 스웨덴 왕위 계승 분쟁으로 스웨덴-폴란드 전쟁을 벌여 리가를 포함한 리보니아를 실질적으로 석권했으며 1660년 올리바 평화 조약으로 폴란드 바사 왕조의 스웨덴 왕위 주장이 철폐될 때 공식적으로 영유를 인정받았습니다.

  • 스웨덴 왕 개신교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1594-1632년 38세 사망

    제위는 1611-1632년 17세 즉위. 21년간 통치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북방의 사자, 설왕으로 불린다

    혁신적인 복합 무기 체계의 적용과 근대적 전술의 선구자로 최고의 지휘관으로 평가된다

    화기의 파괴력을 이용하고 적에게 후퇴와 재편성의 시간을 주지 않는 신속한 전투로 항상 적을 제압한다

    국경 전쟁에서는 항상 러시아, 덴마크, 폴란드와 대립한다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의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한다

    행정 개혁으로 실시한 인구 조사는 효율적인 세금 징수와 인력 동원을 가능하게 한다

    경제의 개혁과 육성으로 강국으로 부상한다

    1631년 37세 독일 라이프치히 북쪽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작센군과 협조하여 황제군에게 대승하고 유럽의 중요 지도자로 부상한다

    황제군 장군 (카톨릭 구교) 틸리 백작 요한 체리클라에스가 작센주 주도인 엘베 강가의 마그데부르크를 공격한다. 구스타프가 이를 공격해 브라이텐펠트에서 만난다

    1632년 38세 독일 라이프치히 남서쪽 뤼첸 전투에서 신교 스웨덴이 구교 독일에 승리하지만 본인은 전사한다. 갑옷을 입지 않고 코트만 입고 싸우다 전사한다

    근시인 국왕은 안개 속에서 자신의 군대와 분리되 중상을 입고 전사한다

    독일의 카톨릭 장군 발렌슈타인이 뉘른베르크를 공격한다

    전체 북부 독일을 동원한 구스타프는 바이에른을 공격하면서 군대를 오스트리아로 돌려 발렌슈타인이 퇴각하기를 희망한다. 작센을 둘러싼 발렌슈타인과 구스타프가 루첸에서 만난다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스웨덴 왕 개신교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1594-1632년 38세 사망

    제위는 1611-1632년 17세 즉위. 21년간 통치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북방의 사자, 설왕으로 불립니다

    혁신적인 복합 무기 체계의 적용과 근대적 전술의 선구자로 최고의 지휘관으로 평가되며

    화기의 파괴력을 이용하고 적에게 후퇴와 재편성의 시간을 주지 않는 신속한 전투로 항상 적을 제압했습시다

    국경 전쟁에서는 항상 러시아, 덴마크, 폴란드와 대립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의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합니다

    행정 개혁으로 실시한 인구 조사는 효율적인 세금 징수와 인력 동원을 가능 경제의 개혁과 육성으로 강국으로 부상

    1631년 37세 독일 라이프치히 북쪽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작센군과 협조하여 황제군에게 대승하고 유럽의 중요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1632년 38세 독일 라이프치히 남서쪽 뤼첸 전투에서 신교 스웨덴이 구교 독일에 승리하지만 본인은 전사한다. 갑옷을 입지 않고 코트만 입고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라틴어식 이름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로도 널리 불린다. 그는 근대적 전술의 선구자로서 유명하며, 혁신적인 복합 무기 체계와 획기적인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지휘관들의 반열에 드는 것으로 흔히 일컬어진다. 그의 전술은 화기(火器)의 파괴력과 적에게 후퇴 및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신속한 전투를 계속한다는 데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요소가 종합되어 싸움터에서는 항상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개발한 새로운 전술을 적군도 모방하게 되면서부터 스웨덴군의 전투력의 우위는 차츰 약화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계속된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에 16세의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세 개의 전쟁을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러시아와의 국경 전쟁, 덴마크와의 국경 전쟁 그리고 사촌인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3세 바사와의 전쟁이 그것들이다. 이런 전쟁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그는 30년 전쟁에 루터파로서 개신교 측을 지원하며 참전함으로써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판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고의 무기들, 잘 훈련된 장병들, 효과적인 포대, 전쟁 자금 조달에 능률적이었던 정부의 뒷받침을 바탕으로 1631년 브라이텐펠트(Breitenfeld)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는 거두고 일약 유럽의 주요 지도자로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일년 뒤인 1632년 뤼첸(Lutzen) 전투에서 비록 스웨덴군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측은 가톨릭 측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지만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으며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자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치세동안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의 지역 세력의 지위로부터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였고 근대 초창기 정부의 모델이 되었는데, 널리 알려진 그의 군사적 업적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그의 행정 개혁과 경제의 육성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행정 구역별 인구 조사를 시작했으며, 이는 중앙 정부로 하여금 더욱 효과적인 세금 징수와 인력 동원을 가능하게 하였다. 역사가 크리스터 요르겐센은 경제와 상업을 개혁하고 근대적인 관료제에 바탕을 둔 전제 정치를 도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 전장에서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개혁은 또한 거의 중세적 성격에 가까웠던 경제와 사회를 변환시켰으며 독일 원정과 스웨덴 제국의 존립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