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남연군의 분묘 도굴 사건으로 오페르트는 어떤 조치를 받았나요?
아무리 국력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남의 나라에 와서 최고 군력자의 아버지의 묘를 파헤친 독일인 오페르트는 이후 어떤 처분을 받았으며 이에 가담한 조력자들은 또 어떤 처벌을 받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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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
도굴에 실패한 오페르트는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선과 교섭하기로 마음먹고, 뱃머리를 돌려 북상하여 5월 13일에 영종도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페르트는 대원군 앞으로 서신을 보내어 교섭을 시도합니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영종첨사 신효철의 명의로 강경한 내용의 답신을 보내어 오페르트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오페르트는 5월 17일에 20여 명의 선원들을 거느리고 영종도에 상륙하였다가 조선측과 사소한 충돌을 일으켰고,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2명의 마닐라 출신 선원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고 철수, 상하이로 돌아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