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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고집한 이유는 뭘까요?

열강들을 이길 수 있다는 특별한 자신감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정치적인 이유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걸까요?

그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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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에 대해 강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병인박해로, 병인박해는 1866년 조선에서 천주교를 탄압했던 사건으로 천주교와 관련된 사람들을 처형하고 그 수가 8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천주교를 탄압한 것은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을 맺었는데 이때 러시아는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면서 통상을 요구, 당시 조선은 러시아에 대해 경계심이 강해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 당시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했는데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와 교섭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가자 대원군은 정치적인 곤경에 빠졌고 천주교 사람들을 탄압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천주교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여주게 됩니다.

      또,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면호가 백령도앞에 나타났고, 그들은 상선이라고 하지만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력으로 공격을 하던 해적선과 같았으며 제너럴셔먼호는 포를 통해서 조선을 공격, 이들의 공격이 계속되자 조선의 관군도 공격을 했고 결국 선원들 모두 불타 죽게 됩니다. 미국은 이 사건을 수사하며 조선에게 책임을 물어 신미양요를 일으키게 됩니다.

      또 병인양요는 병인박해에 대항해 프랑스의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으로 병인양요는 프랑스가 스스로 물러나 조선이 승리한 듯 보이지만 조선의 피해가 막대했고 당시 프랑스에 빼앗긴 역사적 유물도 많았습니다.

      결국 조선은 프랑스와의 수교통상을 절대 하지 말자는 생각을 가지는 계기가 됩니다.

      또 오페르트도굴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프랑스선교사, 미국인, 말레이시아인, 조선인안내자 등 100여명이 몰려가 묘를 파헤치는데 그 목적이 시체를 인질로 삼아 조선과 수교통상을 하려는 목적, 묘의 부장품을 가지려 했던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국 쇄국정책에 대한 의지를 굳건히 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양 열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합니다.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문호를 닫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았던 대외정책입니다.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를 닫아 서로 통상하지 않는 정책을 말합니다.

      주로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의 대외정책을 표현하는 개념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후기 대원군은 서구열강의 통상압력을거부하고 나라의 문을 굳게 걸어잠그는 쇄국정책을 쓰고 척화비를 세우는 등 서구열강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낸 원인은 영국과 프랑스의 청나라 침공때문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침공으로 베이징까지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이 전쟁을 중재한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여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흥선은 극도의 불안감을 갖게됩니다. 그리고 그 불안감으로 프랑스를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코자 했으나 대신들의 우려에 프랑스와 관련없음을 증명하려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심하게 했고 이깃이 병인박해 즉 병인사옥으로 프랑스함대의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입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조선은 더욱더 문을 걸어잠그는 쇄국정책을 쓰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국이었던 중국이 ‘서구 세력과의 통상’으로 멸망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흥선군과 조선 정치권은 통상에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통상을 잘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서구와의 통상 이후 만일 근대화에 실패한다면? 영락없는 식민지 행이다. 통상과 무역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투자이다

      흥선대원군은 시대상을 훌륭히 파악한 개혁가였다. 경복궁, 당백전에 관련해서라면 흥선대원군을 마구 욕해도 좋다. 욕먹을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하지만 그의 쇄국정책과 근대화 실패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아무리 조선을 틀어잡은 개혁가라 하더라도 세계까지 틀어잡기에는 너무 조선이 약한 나라였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고종의 생각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열강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무력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열강들의 군사력에 비해 조선의 군사력이 열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열강들 간의 경쟁을 이용하여 조선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침략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고, 무력으로 저항할 결심을 굳혔습니다. 고종은 친러파 인사들을 중용하여 러시아의 지원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에 저항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열강들의 군사력에 비해 조선의 군사력이 열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열강들 간의 경쟁을 이용하여 조선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을 이용하여 조선의 독립을 지켜내려고 했습니다.

      결국, 고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열강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고종의 생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고종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위대한 군주였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