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의 위세를 등에 업고 기철이 행한 만행들은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기황후의 친가족인 기철이 고려의 권신으로서 고려를 위해 일하지 않고 갖가지 만행들을 저질렀다고 알고 있는데요.
무슨 짓들을 저질렀나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농장의 확대
=> 당시 농장은 권문세족-친원파들의 재산을 증식해가는 용도로 활용된 토지들로서, 백성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강탈하여 만든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이 농장은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면세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 농장이 확대된다는 것은 세금을 내는 땅의 축소를 의미하며 남은 땅은 그만큼 세금이 가중되어 백성이 갈수록 어려워지게 되지요.
2.낙하산 인사
=> 정부의 요직을 자신의 정치일파들로 채워 당시 고려왕조가 원에게서 벗어나려는 개혁정치에 엄청난 장애물로 작용하였습니다.
3.불교계의 타락
=> 이들은 불교를 정치-경제적으로 후원하였는데, 이들과 맞닿은 불교계가 타락하면서 고려 말기 불교가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4.민심 파탄
=> 위의 1번과 연계되는 대목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철은 고려 후기 요양행성(遼陽行省) 평장정사(平章政事)를 역임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이다. 몽골식 이름은 바얀부카[伯顔不花]로, 누이동생이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이다. 원나라로부터 요양행성 평장정사에 임명되고, 고려에서는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로 압송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황후의 위세를 믿고 토지를 점탈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고, 쌍성총관부 반민과 역모를 꾸몄다는 점을 들어 권겸(權謙)·노책(盧頙)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녕하세요. 엄재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철은 고려로부터 덕성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기황후의 권세를 통해 권력을 쥐게 된 기철과 그의 형제들은 날이 갈수록 교만해지고 포악해졌으며 권력 남용에다 토지를 무단으로 강탈하는 등의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1356년(공민왕 5) 기황후의 위세를 믿고 토지를 점탈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고, 쌍성총관부 반민과 역모를 꾸몄다는 점을 들어 권겸(權謙)·노책(盧頙) 등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철은 원나라 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었으며 고려로부터 덕성부원군에 봉해졌고 황후의 권세를 통해 권력을 쥐게 된 기철과 그의 형제들은 교만해지고 포악해졌으며 권력 남용에 , 토지를 무단으로 강탈하는 등의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원의 세력이 약화되자 친원파 권겸, 노책 등과 결탁하여 친척과 심복들을 요직에 앉혀 세력 기반을 구축했으며 배원 정책을 쓴 공민왕이 기철 일당을 제거하려고 궁중에 연회를 베풀어 불러들여 권겸과 함께 주살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철은 1338년(충숙왕 7)경 정순대부(正順大夫) 좌상시(左常侍)로 재직한 것이 확인됩니다. 충혜왕 복위 후 원나라에서 기철을 정동행성(征東行省)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하고 ,고려에서는 정승에 임명한 후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으로 봉하였습니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3월에는 권적(權適)과 함께 원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파견되었습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8월 기철은 이운(李芸) · 조익청(曺益淸) 등과 함께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충혜왕의 비행을 고발하여 폐위를 건의하고, 같은 해 11월 충혜왕의 체포와 압송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충혜왕 체포 후 홍빈(洪彬)과 함께 정동행성을 관장하였으며, 충목왕이 원나라에서 즉위하여 고려로 돌아오자 행궁(行宮)으로 가서 국새(國璽)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공민왕 초기에 기철은 요양행성(遼陽行省) 관리로 활동하였다. 1355년(공민왕 4) 1월 원나라에서는 요양행성의 좌승(左丞)이었던 기철을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승진시켰으며, 이듬해 4월에는 ‘대사도(大司徒)’를 더해서 그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기철 등 부원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기철 세력이 기황후의 위세를 믿고 토지와 인구를 점탈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는 점, 쌍성총관부 반민을 끌어들여 역모를 꾸몄다는 점 등이 부원세력 숙청의 배경이었습니다. 공민왕은 그해 5월 18일 곡연(曲宴)을 열어, 기철 · 권겸(權謙) · 노책(盧𩑠)과 그 일족을 초대한 후, 이들이 도착하는 대로 모두 주살(誅殺)하고, 피신한 경우에도 끝까지 찾아내어 처단하였습니다. 주살된 인원수만 25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숙청이었습니다.
부원세력 숙청에 이어서 반원 개혁조치도 차례차례 추진되었습니다.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하고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였으며, 인당(印璫)을 보내 압록강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3참(站)을 공격하여 고려 영토로 편입하고, 원나라 지정(至正) 연호를 정지하여 고려가 원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선언하였습니다.
부원세력 숙청과 반원 개혁의 정보를 입수한 원나라에서는 두 달 뒤인 7월에 중서성 단사관(斷事官) 사데이칸[撒迪罕]을 보내 국경 침입을 문제삼는 내용의 조서를 전달했습니다. 이에 대해 공민왕은 인당을 처형하여 성의를 보이는 한편, 부원세력 숙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의 표문을 보내 무마하고자 하였습니다.
기씨 일족의 처형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이에 분노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에게 복수를 강요하였습니다. 뒷날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왕으로,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그 원자주12로 옹립하여 최유(崔濡)를 보내 고려를 침입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권력 남용에다 토지를 무단으로 강탈하는 등의 횡포를 일삼았다.
복위한 충혜왕이 엄청난 폭정과 잔인한 만행들을 일삼자 기철은 원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충혜왕을 폐위하고 정동행성을 다시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충혜왕에 빌붙어 권세를 부리던 이들은 모두 원나라 사신들에 의해 처벌을 받았고, 기철은 홍빈과 함께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에 임명되었다. 충목왕 때 고려를 개혁하려는 정치도감이 활동했는데 이들은 충혜왕의 폐위와 간신들의 퇴출이라는 공동 목표를 이룬 동지였으나, 강탈된 전민을 원래대로 돌리려는 정치도감은 기철의 일족을 압박했다. 정치도감의 조사를 받던 기삼만이 옥에서 죽임을 당하자[7] 기황후의 간섭으로 정치도감은 유명무실해졌다. 충목왕이 죽은 뒤에는 덕녕공주의 명을 받고 전 정치도감판사 왕후와 함께 정동행성의 일을 맡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