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은 무엇이고 왜 일어난 것인가요?
순장은 무엇이고 왜 순장을 하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노동력이 중요했을 터인데 왜 소중한 노동력을 희생한 것일까요? 순장이 왜 나중에 금지되었나요?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순장은 산 사람을 묻은 것입니다.
아주 옛날에는 여러 나라에서 순장의 풍습인 군인과 부인과 노비를 함께 묻었습니다. 또는 관게된 사람입니다
주인이 죽으면 노비역시 주인과 함께 가야 한다고 당연히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라 지증왕 3년에 금지 하였다고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순장(殉葬)은 고대에 왕이나 귀족 등
고위층이 사망하였을 경우
처자와 노비(때때로 가축)를 장례식에서 함께 매장하던 일이다.
왕이 죽을 경우 그 수하의 시녀나
내관을 함께 매장하기도 했다.
순장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순장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죽음이란 특별한 사건을 놓고 다양한 해석을 해왔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 아닌 무엇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도 현세의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특히 신분에 따른 계층의 차이가 생겨난 후, 권력을 가진 이들은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권력이 계속되기를 원하였다. 죽음 이후에도 현세의 삶이 재현된다는 믿음에, 현세에서 부리던 시종들이 죽음 이후에도 자신을 봉양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해져 등장한 것이 순장이다.
순장은 신분질서가 확립되어 권력자가 등장하고, 가부장(家父長) 질서가 확립되며, 문명이 발달할 무렵 시작된, 전 세계에 걸쳐 분포하는 장례 풍습의 하나였다. 대표적으로 수메르와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과 이집트, 중국의 상왕조(商王朝)에서 순장 풍습이 발견되었다. 우리 역사에서는 기원전 7세기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을 고조선시대 세력가의 순장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신라 지증왕은 502년에 순장을 폐지시켰다. 삼국시대 말기 무덤에는 이미 순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순장을 폐지하게 된 것은 불교의 내세관 도입으로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이 변화한 탓이 크다. 불교의 내세관은 사람이 현세의 모습으로 그 다음 세계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고 하였다. 불교의 전파에 따라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 불교의 내세관은 차츰 기존의 순장 풍습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에서는 아직까지 순장 무덤이 발견된 바 없다.
순장 폐지에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산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면 그만큼 노동력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가 곧 국력이며, 치열하게 이웃나라와 경쟁하던 시대에는 순장이 적합하지 않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46년 효덕천황(孝德天皇)이 순장을 금지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이때 그는 백성들이 빈궁해진 것은 묘를 만드는데 너무 많은 비용을 들였기 때문이니 장례에 드는 비용을 줄이도록 규정을 정했다. 그는 자신의 무덤에는 금, 은, 동, 철을 넣지 말고, 실제 수레가 아닌 토기로 옛 수레를 만들고, 풀을 묶어 인형을 만들어 순장을 대신할 것을 명했다. 왜국의 사례처럼 경제적 이유 탓에 차츰 무덤에 호화로운 재물을 넣는 것도 줄이고, 순장도 금지하게 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장 [殉葬] - 신분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한국의 생활사, 김용만)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순장은 죽은 뒤에도 피장자(被葬者)의 평상시 생활이 재현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왕후 또는 귀족 등이 사망했을 경우에 첩(妾)·신하·종자(從者) 등을 함께 매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풍습은 ㅇ리 부여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 되어 나타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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