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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9

발해는 어떻게 세워졌고 어떻게 멸망했나요

안녕하세요 발해는 우리나라 역사가운데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요 왜냐하면 그 당시 통일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상태였기 때문인데요 발해는 어떻게 세워졌고 어떻게 멸망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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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여행자75
    시간여행자75 23.12.19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고구려 유민들과 고구려와 함께 하던 주변 부족국가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였으나 그 유민들과 세력들은 인정하지 않고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신라도 백제, 고구려가 망하였으나, 그 지역을 당의 세력이 들어와 있었기에 오롯히 통일했다고 할 수 없던 상황입니다. 이에 고구려, 백제 부흥세력들과 힘을 연합하여 당에 저항하였고, 결국에 신라와 당의 전쟁에서 신라는 당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하였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가 가지고 있던 영토의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을 뿐 나머지는 고구려 장수였던 대중상, 대조영, 걸사비우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등을 규합하여 국호를 진이라고 하고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가게 됩니다.

    발해의 초기 정식 명칭은 진입니다. 그래서 큰 진 나라다 하여 대진국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대진국의 영토가 커지고 힘이 강성해지자 당시 중원의 패자였던 당나라가 자신들은 황제국가로 진국을 제후국인 것처럼 인정하여 대중상은 진국공, 걸사비우를 허국공이라 봉한다는 칙서를 내렸고, 걸사비우가 이를 거부하였고, 당과 대치하다가 사망하였고, 대중상도 얼마 후 사망하고, 대조영이 황위에 오르자 당에서는 그것을 또 격하하여 발해군왕에 봉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사서를 기준으로 발해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그 전에는 일본 등 주변국에서는 여전히 고려라고 불리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진국 발해는 황제국으로 전승한 고구려 이상으로 맹위를 떨친 강국으로 해동성국이라 불리었습니다. 문왕 이후에는 외교적으로 발해라는 국호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대진국 발해는 고구려계와 말갈계를 대표적으로 하여 다민족 국가로서 고구려계였던 대중상, 대조영, 말갈계의 걸사비우를 주축으로 하여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 딱 30년 후인 698년에 건국되었고, 926년에 거란의 침공과 내분으로 인해 멸망하였다고 합니다.

    멸망의 시점은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발해 멸망 후 바로 그 유민들이 후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판단되어집니다. 그 이유는 책부원귀, 오대회요, 구오대사, 오대사기, 속자치통감 등의 중국 사서에 발해 멸망 3년 뒤인 929년 5월 발해에서 고정사라는 사신을 파견하는 기록도 나오고, 929년 7월 19일 그 고정사를 태자 세마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고려사>에 934년 발해 태자 대광현이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귀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후 기록에는 발해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고, 같은 대씨 성의 왕과 태자에 대한 기록에서 정안국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발해라는 국호가 정안국으로 내부적인 이유에 의해 바뀌지 않았나 판단됩니다. 200년 이상 지속된 강국이었습니다. 991년 기록에서도 왕자인 대원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도 왕권을 발해 왕족인 대씨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발해의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는 926년 거란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 시기에 백두산의 화산폭발이 있었던 시기이므로, 전쟁 패배에 이어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화산 폭발이었던 자연재해가 있었기에 더 이상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통일 신라는 결국에 고구려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태봉국을 거쳐, 왕건을 통해 또다시 통일되어 고구려라는 이름을 계승하여 고려(고리라고도 함)를 건국하였으니 그 명맥이 계속 이어져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건국

    668년 당은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을 차지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은 고구려 유민을 통제하기 위해 영주(榮州)로 강제 이주하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해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당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으므로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봉기하였고 혼란한 틈을 타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사리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탈출해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동 도중 말갈인을 이끌던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을 이끌던 대사리 걸걸중상이 전사하면서 대조영이 무리를 이어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와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에 위치한 읍루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을 차지하고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를 정복하여 도호부의 한족들을 노비로 강등시키면서 곧 진국(震國, 振國)을 건국하였고 말갈 촌장, 고구려 촌장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진국왕(振國王)이 되었다. 고왕(高王) 대조영은 천통(天統)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다.

    당나라는 대조영의 발해 건국이 기정사실화 되고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를 발해에게 정복당하고 안동도호부도 멸망하자 발해인들을 달래기 위해 705년 책봉을 시도했지만 불발되었다.

    713년 대조영은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이 되었고 홀한주(忽汗州)[28]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벼슬을 추가했다. 당나라는 발해의 번성에 굴복하였다.

    안정과 성장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는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말갈족들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영토 확장의 편리성과 지방세력의 약화, 즉 왕권 강화를 위해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 현덕부로 옮긴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켰다. 가령 발해 북쪽의 흑수부(흑수말갈)와 연합하여 대응해 나갔다. 발해는 당나라 지역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고 당나라인들은 발해를 두려워해 중국인 한족(漢族) 여성들을 발해에 상납하였다.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아우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족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산둥(山東)의 등주(登州)를 급습하여 순식간에 점령, 자사 위준을 죽였다. 한편, 요서의 마도산(馬都山)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 군과 격돌하였다. 이때 신라는 당나라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발해에 출병하였으나, 겨울에 공격하여 진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하여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왕 시기에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어 동북 방면의 말갈을 복속시켜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영토 확장과 발전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756년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발해의 수도가 상경으로 옮겨진 이후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발해는 당의 문물도 수용하여 3성(三省)[33]과 6부(六部)[34]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았다. 발해는 문왕 때부터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35]로 천도하였으나, 5대 성왕(成王) 때 다시 상경 용천부로 천도하였다.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대원의(大元義)·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지배층의 내분으로 국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9세기 전반,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대손으로 간왕의 삼종숙(三從叔)인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 당은 발해의 융성함을 일컬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발해는 선왕 시기에 중국 문헌에 따르면 바다 북쪽으로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고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다. 또 요동 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 유역을 기습적으로 점령하고, 그 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영역을 형성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는데,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방의 주 밑에는 여러 현을 두었다.

    8세기 전반에서 9세기 후반기에 발해(혹은 속말)말갈이 남만주 지역에서 아무르 유역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빠르게 아무르 유역을 정복하며, 이후 아무르 강 상류를 따라 서아무르 평원의 북서쪽인 실카강까지 진출했다. 비트틱 산 성터, 류잔카 성터, 우스티-쵸르나야 성터 등과 같은 유적이 그러한데,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 주민들이 아무르 강을 따라 실카 강까지의 북서지역까지 장악한 결과로 파악한다.[36] 말갈 확장에 대한 지역민인 부르호토이 주민(실위)의 저항은 이주민으로 하여금 실카 강과 초르나야 강의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에 방어용 취락지를 건설하도록 강요하였다.

    쇠퇴와 멸망

    선왕 사후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38] 발해 멸망을 상세히 다룬 요사의 기록[39]을 고려하면 수도 급습설이 유력하다.

    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부족을 통일하고 대거란국(大契丹國)을 건국하였다. 이후 발해와 거란은 요충지인 요동(遼東)을 두고 10년간 쟁탈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발해가 소모전에서 패했다. 요동을 잃은 발해에선 당시 고구려인과 동맹 관계였던 말갈(靺鞨)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10년 간의 공방전으로 요동을 빼앗겼지만 발해는 924년 5월에 요동을 공격해서 탈환한 후 거란인을 포로로 잡았다. 925년 4월 요군은 발해의 신주를 먼저 공격해서 요동 방어선으로 군사를 몰리게 만들었고 이는 12월까지 계속되었다. 요는 발해가 요동에 방어선을 다진 걸 틈타서 발해와의 무역로인 거란도를 통해 기습 공격하였고, 부여부(夫餘部)를 3일 만에 함락하였다. 이후 발해의 혼란을 틈타서 요의 군대는 수도 홀한성(상경용천부)으로 직진하여 함락시켰다.

    발해와 요의 전쟁은 무려 20여 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요동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는 요의 승리로 일단락되고 발해는 요동 지역의 전략적 이점을 상실하면서 경제, 군사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비록 발해는 요동 지역을 상실했지만, 아직 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국가였다. 919년 요동을 병합한 요의 침입을 격파하고 924년 5월 발해가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서 함락시킨 후,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발해의 군사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국제적 환경은 몽골 초원의 위구르 제국의 해체, 토번 제국의 붕괴, 중원의 당나라의 몰락과 오대십국시대, 한반도가 후삼국으로 분열된 혼란기였다. 이런 가운데 대인선(大仁善)은 군사적인 대응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적절히 요를 견제 하였는데, 주변 국가와 결속을 맺어 요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요사 본기에 '이심'이라는 표현대로, 924년 여름을 기점으로 하여 발해에 내부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발해가 멸망 전부터 고려(高麗)로 망명하는 발해인이 장군 등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귀화한 것이다.

    발해의 이런 내부적 상황을 파악한 요나라는 20여년간의 전쟁 경험을 통한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전술을 계획한 것이다. 즉 요동 방어선을 우회해서 공격해서 수도를 함락시키는 것이였다. 발해 유민들의 저항인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끈질기게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발해의 후예임을 칭하며 건국한 나라는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요나라와 금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