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형제가 독일어 사전 편찬을 시작한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림형제가 독일어 사전을 편찬하게 된 배경은 민족사전이란 아이디어를 나오게 만든 정치적 사회분위기 때문으로 독일이 40여개의 군소국가로 나뉘어 있던 연방국가로, 하나로 묶을 상징물이 중요했습니다.
민족사건은 예를 들어 독일 건국에 대한 헤르만 기념비와 1813년 해방 전쟁 승리를 기념라는 푈커슐라흐트 기념비와 같이 독일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우리 독일 민족이 언어 이외에 공통적이라고 할 만한 것을 도대체 가지고나 있는가! 라는 야코프 그림의 탄식은 1840년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많이 이용되었고 독일민족을 상징할 언어 작품의 탄생을 갈망하게 했습니다.
19세기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유행한 시기로, 애국주의로 시작해 쇼비니즘으로 끝나는 시기였습니다. 후기 낭만주의 이래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위해 노력한 시민들은 자신을 애국주의자라 칭했고, 애국주의자는 지역 공동체와 민족 공동체를 위해 소신을 갖고 활동하나 1848년 혁명은 독일의 통일을 끝내 이루지 못합니다.
혁명의 실패는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 참여에서 문화참여로 전환하게 만들며, 독일의 문화 정체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됩니다.1848년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급진적 민주주의자이든 입헌적 자유주의자이든 자신들이 진정한 애국주의자임을 자처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1830년부터 출판업자 카를 라이머는 그림 형제에게 루터에서 괴테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어휘를 기재할 근대 고지 독일어 사전 편찬을 여러번 제안, 그러나 거절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스캔들이 이런 상황을 급변시키는데 그림형제를 포함한 괴팅겐 대학 교수들이 1837년 11월 18일에 1833년 하노버의 새 군주인 아우구스트 2세가 너무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판단해 무효로 선언했던 헌법 실행을 요구 , 여기에 참여한 소위 괴팅겐 7인은 국가 위협적 성향을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합니다. 그림형제는 하노버 왕국에서 추방, 정치적 망명자로 이전 거주지였던 카셀로 돌아갑니다.
이런 정치적 사건은 민족주의와 국제적인 연대감과 함께 그림 형제를 궁극적으로 당대 가장 유명한 독일인으로 만드는 동시에 무직자로 만들게 됩니다.
이에 따라 라이머는 자신이 원하던 사전 프로젝트를 다시 시도, 그는 고문헌학자인 모리츠 하우프트와 함께 1838년 3월 3일 빌헬름 그림에게 자신의 제안을 다시 고려해 보고 야코프도 설득해 보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고 라이머와 하우프트가 4월 초 방문 후 사전을 편찬하기로 합니다.
그들에게 사전 출판은 수입원일 뿐 아니라 괴팅겐 사건 후 더이상 보장되지 않았던 독자적 학문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 줄수있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