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세요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로 알고 있는데,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과정, 결과, 이 사건 후 미친 영향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실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드레퓌스 사건 (Dreyfus Affair)은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사건을 말합니다.
결국, '사건'은 1789년 혁명 이후 그 어떤 것보다 프랑스를 분열시켰다고 합니다. 보불전쟁 후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프랑스 포병대위 드레퓌스의 간첩혐의를 놓고 프랑스 사회가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어 격렬하게 투쟁했던 정치적인 스캔들로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간첩 조작사건을 말합니다.
드레퓌스의 가족은 그의 무죄를 확신했고, 기자 베르나르 라자르도 마찬가지였다. 드레퓌스는 반유대주의에 희생당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피카르 중령은 진상 은폐의 증거를 찾아냈고, 군사기밀을 넘겨준 것은 에스테라지 소령이라고 밝혔습니다.
1894년 12월, 드레퓌스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종신형과 치욕적인 군적 박탈식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군적 박탈식장에서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쳤지만 "유태인을 죽여라"라는 군중들의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그는 강제로 불명예 전역한 뒤, 1895년 2월 21일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합니다. 사실 재판 과정에서 서명과 자신의 글씨체가 다르다는 이의가 있었으나, 피고가 글씨체를 바꾸어 썼다는 말도 안 되는 근거를 내세워 묵살하였습니다. 실제 자신의 글씨체를 바꾸어 쓰기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일부에서 드레퓌스에 대해서 무죄 주장이 있었으나, 그 당시 팽배했던 애국주의, 반유대주의, 반독일주의에 의해 가볍게 묵살되었습니다. 드레퓌스는 부족한 증거 자료에 기초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사실 드레퓌스는 무죄였다(발견된 정보 유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그 이름의 첫글자가 암호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됐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당시 고급 장교들은 그들의 실수를 덮으려고 사실을 은폐했으며, 반유대적인 가톨릭교회와 보수주의 언론들도 드레퓌스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사건이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건으로 우파 고급 장교들 등 재판 관리자들은 많은 비난을 받았고, 결국 이런 비난이 드레퓌스를 무죄로 이끌어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반유대주의의 문제를 많이 느끼게 되었고, 결국 반유대주의는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하다가 결국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거의 사라졌습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 후반의 수년 동안 프랑스를 휩쓸었던 반유대주의와 이 때문에 희생된 무고한 드레퓌스의 무죄 여부를 놓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군부 등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이 격돌했던 사건입니다. 에밀 졸라를 비롯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한 드레퓌스파들에 반하여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던 반 드레퓌스파들은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벌리기 위하여 '프랑스 조국 연맹'을 결성하였습니다. 프랑스 학술원의 가톨릭 회원들은 이 단체에 일괄적으로 가입했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적극적인 반드레퓌스 운동은 결국 드레퓌스의 무죄로 끝나며 프랑스의 정교분리 원칙인 라이시테 원칙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드레퓌스 지지파들의 이념과 전략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반교권주의 운동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이란 보불전쟁 후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프랑스 포병대위 드레퓌스의 간첩혐의를 놓고 프랑스 사회가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어 격렬하게 투쟁했던 정치적인 스캔들로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간첩 조작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가 프랑스 정보요원이 파리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빼돌린 문서(명세서)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외딴섬에 유배되면서 시작되었다. 증거, 범행 동기, 범행 방법과 시기 등이 명확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기소되었으며 실질적으로는 유대인이라는 이유가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가족의 구명운동과 소수 지성인들의 노력으로 1897년 진범이 구속되었으나, 명백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신뢰 추락을 이유로 사건을 은폐하고 증거를 조작한 후 진범을 풀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이란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로 일어난 전쟁(보불전쟁 )후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프랑스 포병에서 근무 했던 대위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놓고 프랑스 사회가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어 격렬하게 투쟁했던 정치적인 시건을 말합니다. 이 사건은 대표적으로 국가가 개인에 대해 행한 인권 유린 , 그리고 간첩 조작 사건, 프락치 시건이라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