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인쇄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나요?
얼마전 사극 드라마를 보는데 주인공이 책을 필사를 하는데 일일히 손으로 써가면서 필사를 하더라고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드라마였는데 조선시대때에는 아직 활자인쇄가 보급이 안되었던 때인가요? 활자인쇄를 본격적으로 시작된것은 언제부터였나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무에 글자를 새겨서 만든 활자.
목활자는 바로 책을 찍는 데 썼거나, 금속활자를 부어내기 위해서 거푸집에 보기자[父字]로 넣기 위해 만든 것이 있었다. 나무활자는 결이 곱고, 치밀하며 단단하여야 하기 때문에 대추나무 ·가래나무 ·배나무 ·도장나무(회양목 ·황양목) ·박달나무 등을 주로 사용하였다.
처음에 나무활자는 먹을 빨아들이고, 결이 글자면에 나타나므로 흙활자보다 못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흙활자가 여러 번 되풀이 쓸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자 나무활자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나무활자로 찍은 책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서하(西夏) 또는 탕구트[黨項]에서 1302년에 찍은 《화엄경(華嚴經)》이다.
조선에서는 1395년(태조 4) 처음으로 백주지사(白州知事) 서찬(徐贊)이 각자(刻字)한 목활자로 명(明)나라 법전의 이두역서(吏讀譯書)인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100여 부를 인출(印出)하고, 97년에 태조 이성계가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을 찍어서 나누어 주었는데, 현존하는 목활자본 중 가장 오래 된 이 공신녹권은, 함경도에 살던 원종공신 심지백(沈之伯)의 후손에게 전해지던 것이 이인영(李仁榮) 교수에 의해 감정 ·연구되어 부산 동아대학박물관에 소장되었으며, 국보 제69호로 지정되었다.
1403년(태종 3) 조선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부어 만들 때 나무활자는 이 ‘계미자(癸未子)’의 ‘보기자’ 구실을 하여, 이 나무로 새긴 보기자를 해감모래에 넣고 거푸집을 만들었다.
이후 모든 금속활자의 보기자는 나무활자로 만들어져, 보기자로 새긴 활자는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글자체의 기본이 되었다.
보기자가 아니고 바로 책을 찍는 데 쓰인 목활자도 많은데, 그 중 특히 조선 후기인 18세기부터는 각 지방에서 문집(文集) ·족보 등을 찍는 데 많이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목활자는 큰 나무판자에 많은 글자를 새겨 책을 찍던 목판과는 달리 나뭇가지로도 간단히 새겨낼 수 있고, 작업공간이나 비용 등 작은 규모로 할 수 있어 민간에서도 많이 활용하였다.
민간의 나무활자나 판틀 새기는 연장, 판 짜는 연장 등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편으로, 국립도서관 ·경북대학을 비롯하여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나무활자도 많다.
목활자는 약간 규모가 큰 경우, 두께 한 치 정도의 나무판자를 만들고, 이를 다시 네모난 한 치 평방의 모기둥으로 켜, 웅덩이에 1개월 이상 넣어서 나무기름을 뺀 다음, 글자를 새길 면을 대패질해서 글자를 쓴 종이를 뒤집어 붙여 글자를 새기거나, 때로는 나무면에 거꾸로 직접 써서 새기기도 한다.
이와 같이 글자가 새겨지면 글자마다 톱으로 잘라내고, 옆면과 뒷면을 다듬어 활자를 완성하는데, 작은 활자는 나뭇가지를 같은 방법으로 해서 만든다.
활자 모양은 등이 뾰족한 것, 평평한 것, 등을 파서 경상다리같이 된 것 등이 있으나, 평평한 것이 가장 많다. 판짜기는 금속활자의 방법과 거의 같아, 밀초로 밑을 깔고 그 위에 판을 짜는 식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족보를 찍어주며 다니던 인쇄행상들의 경우를 보면, 이들은 나무활자와 대나무로 만든 활자칸막이 서랍 및 활자정리판으로 조판하였고, 종이와 대나무로 만든 활자쟁반 등 가벼운 인쇄용 기구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러한 인쇄행상은 18∼19세기까지 성행하였다.
목활자인쇄는 1895년(고종 32) 학부(學部)에서 목활자로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 등 교과서를 인쇄한 후에는 납활자인쇄로 대체되었으나, 특히 영남 ·호남 지방 등의 민간에서는 8 ·15광복무렵까지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