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청나라의 이홍장은 왜 조선과 미국을 연결했나요?
1882년 청나라의 이홍장의 알선으로
조선과 미국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되었는데
청나라의 입장에서 왜 조선과 미국을 연결시키려 한 것인가요?
조선과 미국이 연결되면 당시 청나라에는 어떤 이득이 있었나요?
- 러시아의 남진 정책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국가적 숙원 사업이 부동항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흑해로 진출하려고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자 영국, 프랑스, 터키가 가만있지 않았죠. 그래서 1853년 나이팅게일로 유명한 크림전쟁이 발생하였고 여기서 러시아가 패전을 하게 됩니다. 결국 러시아로써는 유럽에서는 부동항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동쪽으로 진군하여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흑룡강 이북을 점령하였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병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게 됩니다. 블라디보스토크도 겨울철에는 가끔 얼었죠. 그래서 아예 얼지 않는 항구를 만들고자 눈독을 들인 곳이 바로 한반도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어떻게 해서든 한반도를 병합하려 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조선이 정신을 못차리고 자꾸 청나라에 빌 붙어 버리자 결국 일본을 강화시켜서 러시아를 방어하려고 하는 영국, 미국의 전략에 청나라가 자꾸 찬물을 끼언졌기 때문에 영국/미국 입장에서는 청나라가 조선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켜도 수수방관 하였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전하였음에도 조선왕 고종은 정신을 못차리고 친러정권을 수립하고 친러파를 적극 기용하자 일본은 다시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여기에 놀란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을 통하여 아예 러시아 속국을 자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1905년 러일전쟁입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증국번의 제자가 되다
본명은 장동(章銅)이고 자는 점보(漸甫), 자불(子黻)이다. 호는 소전(少荃), 의수(儀叟), 성심(省心)이다.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문안(李文安)이고 형은 청나라 때 양광총독1)을 지낸 이한장이다.
25세 되던 1847년에 진사 급제했고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수학했다. 베이징으로 이주한 이홍장은 증국번(曾國藩)에게 유교와 학문을 배우며 그의 제자가 되었다. 또한 그의 막료2)로 활동하며 군사 전략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며 공을 세우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소현3), 화주4)를 점령하여 공을 세우고 안후이 순무(巡撫, 지방장관)를 지원했다. 1862년에는 증국번의 추천으로 장쑤(江蘇)순무가 되어 사병인 회군을 거느리고 상하이를 방위하는 등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863년에 장쑤성 쑤저우(蘇州)를 공격하여 회복하고 1864년에는 태평천국의 근거지인 난징(南京)을 공략하여, 12년 동안 이어졌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공훈을 세웠다. 그 후 염군(捻軍, 화베이(華北) 지역의 반란 집단)의 반란을 진압할 때도 총지휘관이 되어 공적을 세웠으며, 마침내 중국 내 대부분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홍장은 이러한 군사적 업적을 통해 청나라에서 주목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북양군5)을 직접 지휘 하에 두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양무운동을 전개하다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할 때 휘하에 두었던 회군과 영국, 러시아 등의 지지를 등에 업고 양무운동6)을 전개했다. 1863년 외국어 학교 설립, 1867년 병기창(兵器廠) 창설, 육해군 편성, 유학생 파견 등을 시행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군사 무기를 개발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앞당기고자 노력했다. 또한 군사강국을 이루기 위해 처음으로 근대화한 해군인 북양수사(北洋水師, 북양해군(北洋海軍))를 창설하고 정치적으로 자신의 휘하인 양무파(洋務派) 관료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황해해전에서 일본 해군에 패하여 권력 기반이었던 북양해군을 잃었으며, 평양전투에서도 패해 자신이 양성했던 회군을 잃었다.
청나라의 외교에 깊이 관여하다
이홍장은 청나라 말의 주요 외교 문제를 거의 혼자서 처리했다. 1882년 조선에 원세개를 파견하여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게 하고 묄렌도르프, 데니 등 외국인 고문을 보내는 등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관여했다.
1884년 프랑스와 맺은 청 · 프 간명조약(中法簡明條約), 이듬해에 프랑스와 맺은 청 · 프 신약(中法新約, 월남조약(越南條約))7) 등에도 참여했다.
1895년에는 전권대사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와 협상을 벌여 군비 배상과 영토를 제공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에 조인했다. 이때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왼쪽 광대뼈에 총알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1896년 청 · 러 밀약 등에서도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프랑스, 독일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할양된 요동 반도를 반환하도록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게 만주철도 부설권을 내주면서 만주 지역의 지배권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
1896년 청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으며, 유럽과 미국을 순방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외교적 노력은 목적한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1898년 황하 치수 임무를 맡았으며 양광총독8)이 되었다. 1900년 베이징 조약9)에서 외교 책임자로서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막아내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청나라는 더욱 쇠퇴해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홍장 [李鴻章, Lǐ Hóngzhāng] - 청나라 양무운동의 주도자 (중국인물사전)
1882년 청나라의 이홍장이 조선과 미국을 연결시킨 이유는 주로 정치적인 이해와 현실적인 이익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이해: 청나라는 조선과 미국을 연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기대했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의 내정에 관여하고 조선을 자신의 영토로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현실적 이익: 조선과 미국을 연결함으로써 청나라는 미국과의 무역 및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강대국으로서 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이루고 있었고, 청나라는 이를 알아보고 미국과의 무역을 통해 청나라의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외교적 협력: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조선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을 강화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청나라는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적 관계를 조절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자신의 국익을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과 미국이 연결되면서 청나라에는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외교적 이익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청나라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자신의 국익을 추구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