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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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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전은 왜 단 6개월만 사용됐나요?

조선시대 고종 때 유통 된 화폐인 당백전은 단 6개월만 사용됐다는데요.

그 전 화폐인 상평통보를 두고 왜 새로운 화폐를 발행한 것인가요?

또 왜 그렇게 짧은 기간만 쓰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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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백전을 주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조선 정부의 재정 악화에 있었다고 합니다.

      단시일 내 그처럼 다량의 악화가 시중에 나돌게 되자, 화폐 유통 질서가 큰 혼란에 빠져 버렸다. 상평통보를 가진 자는 당백전과의 교환을 기피해 상평통보를 시중에 내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시중에서는 상인들이 당백전의 사용을 꺼려 일시적으로 물물교환의 형세가 나타났고, 화폐가치의 하락에 따라 물가는 폭등하였다고 합니다.

      악화 당백전의 대량 주조·유통에 따른 이러한 대혼란은 여론을 비등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정부에서도 1867년 4월 당백전 주조를 중단하였고,

      이듬해 10월 장령(掌令)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를 계기로 유통까지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백전은 조선 말기 1866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목적으로 부족한 국가 재원을 채우기 위해 주조한 화폐입니다.

      당백전의 법정 가치는 일반 상평통보의 100배에 해당했으나 실제 가치는 5~6배에 불과했고 경복궁을 중수하는데는 당시 많은 경비가 소요되어 이를 타개하기 위해 김병학 등의 건의로 주조에 들어가 그해 11월부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화폐가치가 20%이상 떨어지는 등의 부작용으로 주조를 중단했습니다.

      당백전은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100문은 일반인들이 쓰기에 너무 어려운 단위였고 액면가와 실제 가치가 크게 달랐습니다.

      당백전의 액면가는 100문이었으나 실제 가치는 5~6문에 지나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당백전을 물품 구입의 수단으로만 쓰고 세금을 걷을 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공신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로 당백전을 계속 발행할수록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1866년 12월 경 쌀 한석당 700문 정도였는데 1867년 4000문 이상으로 급등하게 됩니다.

      상평통보를 녹여 당백전을 위조하는 사람도 나타났고, 상평통보를 가진 사람은 당백전을 가진 사람과 거래하기를 꺼려했으며 시장에는 상평통보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당백전이 악화, 상평통보가 양화가 돼 시중에서는 당백전만이 유통되었고 화폐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혼란이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