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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12.19

신라의 진흥왕의 업적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삼국시대의 신라의 진흥왕은 신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왕으로 알고 있는데요 진흥왕은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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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흥왕은 첫째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였으며, 둘째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상자거 통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황룡사를 건립하고 전륜성왕의 사상을 표방하였습니다. 셋째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넷째로는 대가야를 점령하였습니다. 다섯째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그외에도 적성비와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실상부한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이자 한국사에서 광개토대왕, 근초고왕, 선왕과 더불어 자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군주로 자리매김한 걸출한 명군. 진흥왕이 고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부분은 수백년 가까이 한반도의 패권 싸움이 백제 vs 고구려로 돌아가던 틀을 깨부쉈다는 것이다. 지증왕, 법흥왕 때까지만 해도 신라는 나제동맹과 같이 변수 역할까지는 가능했지만 근초고왕, 광개토대왕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전체의 최강을 다투는 경쟁에서는 사실상 바깥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구도를 뒤흔들어 놓은 임금이 바로 진흥왕이었다. 신라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장악하면서 백제는 해상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고립무원 상태로 전락해버렸고, 고구려도 한강 유역을 상실해 언제든지 수도 평양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국경을 위협당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이전까진 존재감이 별로 없다가 거의 새로 등장하다시피한 신흥 강국 신라에 온 국력을 쏟으면서 맹공을 가해야 했다. 특히 백제는 예전 정세로 바꾸기 위해 더욱 끊임없이 맹공을 가했으나, 도리어 성왕이 전사하여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다. 온달 전설로도 전해지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일시적으로 신라가 밀렸다는 설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진흥왕 대에 확장한 북방 국경은 함경도를 제외하면 고구려 멸망 때까지 줄곧 신라가 유지하며 우위를 점하는데, 이는 진흥왕 대의 영토 확장이 시발점이 된 것이었다.

    또한, 신라는 내물왕 대에 본격적인 중앙 집권화를 시작했지만 내물왕 만년에 왜, 가야, 백제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을 받으면서 결국 중앙집권화가 지체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100년 후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대를 거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확실히 변모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와 대등하거나 더 나아가 이 두 국가를 흡수통일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갖추어 나가는 강력한 정복국가가 된 시기도 진흥왕 대이다.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한 지난한 과정을 겪게 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진흥왕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서로 동맹을 맺어 신라를 협공하는 구도가 되어 진지왕과 진평왕, 선덕여왕으로 이어지는 7세기 중엽까지 오히려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면서 황해로 통하는 통로를 얻어 이때부터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게 되었기에, 넓게 보면 이후 삼국통일전쟁의 당나라, 신라 vs 고구려, 백제, 왜국 구도를 열어 젖힌 것도 진흥왕이다.

    진흥왕이 폭발적 성장을 이끌었지만 그가 일찍 죽어버리고 곧이어 기세가 꺾였던 것은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후계자 진지왕이 4년만에 폐위당해 확장에 필요한 동력을 낭비했고, 이후 무려 100여년이 지난 문무왕의 삼국통일 이전까지 신라는 오랫동안 진흥왕이 만든 판도를 지켜내는 굳히기 태세를 이어나가게 되기 때문. 진흥왕은 42세에 사망했는데, 당시 평균수명이 낮았다고 하지만 유아사망률을 감안하면 40대 초반은 전근대시대라도 아직 활발히 활동할 나이대였기도 하고, 지증왕부터 문무왕까지 신라 중대 대부분 왕들이 진흥왕과 진지왕을 제외하면 50대~70대 정도는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족력을 따져도 진흥왕은 좀 빨리 세상을 떠난 편이었다.

    일각에선 비판도 있는데, 진흥왕 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건 좋았으나 이로 인해 빡친 백제가 무왕, 의자왕 대에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고 주요 요충지인 대야성을 포함한 성들이 함락되고 고구려 역시 맹공을 가하며 후대왕인 진평왕이 고생을 했을뿐만 아니라 당나라가 개입을 안했으면 신라는 하마터면 멸망당할뻔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토인 경상도까지 뚫렸고 고구려-당 전쟁이 없었으면 주필산 전투의 150,000명, 금산의 200,000명, 신성과 국내성의 지원군 40,000명 등 일개 성들에게서 신라 각지에서 긁어모은 주력군과 같은 수의 병력이 뽑혀져 나오고 전투 한번에 10~20만명을 동원하는 고구려군과 백제군 3~4만명이 연합해 들어왔으면 신라는 그대로 망하는 수순을 밟았다는 것이 이 비판의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선후파악을 잘못한 다소 성급한 주장에 불과한데, 한강 유역 점령을 하지 않았으면 당나라의 개입 이전에 이미 영남의 3류 국가로 전락해 도태하여 멸망했을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우선 신라가 거길 차지하지 않았으면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당장 신라의 경쟁상대인 고구려나 백제가 거길 차지했을 것이다. 그들을 상대하는 신라는 한강 유역 생산력의 2배만큼 불리해지는 셈으로 실제 역사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강 유역은 단순히 전략적인 요충지이자 농경지였을 뿐 아니라 당나라와의 교역 루트를 담당했던 곳으로써 이 곳이 없었다면 단순 국력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밀릴 뿐 아니라 중원 왕조와의 교류 및 나당동맹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고구려 - 백제 - 왜국의 협공에 대응하려면 당나라와 외교를 해야 했는데, 남해를 거쳐서 당나라를 가거나, 한강 유역에 위치한 당항성을 거쳐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남해로 이동할 경우 백제에게 가로막힐 확률이 매우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항성의 존재는 신라에게 단비같은 존재였을 수 밖에 없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 당시 신라의 최고 장수였던 김무력을 한강일대를 다스리던 신주의 초대 군주로 임명했던 것도, 신라 최정예군을 대야성을 비롯한 대(對) 백제 전선이 아닌 신주에 배치했던 것도, 한강을 잃으면 신라는 버틸수 있는 기반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한강 유역에 비해 간과하기 쉽지만 한강 유역뿐 아니라 진흥왕대에 신라가 가야 거의 전체를 흡수한 것도 엄연히 진흥왕의 공적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이미 함안 안라국까지 백제군이 동진했던 상황인 이상 적어도 가야 서부지역은 백제의 몫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고, 7세기 신라 서측 국경의 철통 방어선이었던 대야성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비판점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는 한강유역을 빼앗기기 전부터 이미 신라를 틈만 나면 털어버리려고 눈에 불을 키고 있던 나라들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광개토대왕 - 장수왕대의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다스렸고, 나제동맹이 결성되기 이전까지의 백제는 신라의 적국으로서 수차례 전쟁을 주고 받았던 관계였으며, 동맹 기간에도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이었으나 양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가야를 놓고는 신경전이 지속되었다. 따라서 한강 유역의 지배여부와 상관 없이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가 약해보인다 싶으면 덮쳐버릴 준비를 했다.

    따라서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침공해 후대 왕들이 고생한게 아니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과 가야 지방을 차지한 덕분에 훌륭한 군사적 요충지+압도적인 자원+훌륭한 교역망을 얻었고, 이로 인해 멸망할 뻔 한 나라를 살릴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