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여성이 왜 가채를 했나요?
조선시대 여성들이 가채를 하고 또 서로
경쟁도 해서 영조때 금지 시키기도 했다는데 가채를 하면 목도 아프고 힘들었을땐데 가채는 왜 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가체를 쓰고 안 쓰고는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날 여성들이 파마를 하고 염색을 하는 것처럼
옛날 여인들은 가체를 얹어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결혼 전에는 머리를 땋아 내렸다가 결혼을 하고 나면 머리를 얹었죠.
그러나 조선 후기 영조는 가체가 단순히 머리 장식을 넘어 사치스러워지자, 1756년 가체금지령을 내려 결혼한 부녀자들에게 쪽을 찌게 했으며 궁중에서는 머리 정수리 부근에 첩지를 얹어 신분 상하를 구별하게 했다고합니다.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는 유교가 대세였던 남성중심적 사회였지요. 이 시대에 여성 역시 권력과 지위를 어필하는 수단과 함께 미의 목적으로 가체를 활용했다고 합니다. 가체는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모양을 만들어 크고 풍성하게 표현했는데 이후 영조에 의해 금지되었습니다. 해서 조선시대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이 영조 이전에는 가체로 화려하고 영조 이후에는 비녀 족두리 정도로 간소했습니다.
이렇게 가체가 유행한 유래는 '승정원일기'에 적혀있습니다. 몽골에서 왔던 한 공주의 머리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스타들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패션, 명품들을 보고 유행하게 되는것을 생각하면 옛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은것 같네요 ^^
안녕하세요.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유럽에서 귀족들이 가발을 썼던 것과 같은 이유이지요. 남들에게 내가 지체놓은 집안의 여식이다.
왕가의 사람이다 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나에게 공경하게 하려는 수단이었지요. 청동기시대에 청동을 몸에 두른 지배자와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예법으로 자리잡아 왕가에서는 어떻게 양반집에서는 이렇게 하는 규율이 정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의 정장은 가체로
완성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형편이
되면 반드시 장만해뒀다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는 머리에 얹고
나갔다. 예의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
얹어야 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가체는 일상적인 머리는 아니었다.
실제로는 고계머리가 가장
일반적이었고 젊은 층은 낭자쌍계
등도 즐겨 했었다.
-출처:나무위키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은 가채를 하였습니다. 가채는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사회적 제도 중 하나였습니다. 가채는 여성이 결혼 후에도 아버지 집에서 살면서,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동안 남편의 집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가채는 여성이 결혼 후에도 아버지 집에서 살면서, 남편의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편의 집으로 갔을 때, 그녀의 지위와 권리는 남편의 가족, 특히 시어머니와 시숙모 등 상위 여성들에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또한, 가족 관계에서의 갈등과 이혼, 남편의 사망과 같은 상황에서도 여성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채는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과 사회적 활동을 제한하는 한편, 여성이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에서 어떤 역할과 책임을 맡게 될지 사전에 결정되어 있어 여성의 고민과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한, 가채는 남성 중심의 가족 구조를 유지하고, 여성의 지위가 결국 남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채는 여성이 가족 관계에서 안정적인 지위와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해주는 한편,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하는 제도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채라는 것은 여자의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거나 머리 모양을 꾸미기 위하여 머리에 얹거나 덧넣는 딴 머리를 말하는 데요. 고려시대에도 가체의 풍습은 있었다.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영향도 받아 더욱 크게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가체는 부녀자 수식의 절대적인 조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종실록』에는 사람들이 고계(高髻)를 좋아하여 사방의 높이가 한 자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리를 더하여 얹은 머리를 높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머리 사치를 위하여 가산의 탕진은 물론, 심지어는 나이 어린 신부의 방에 시아버지가 들어오자 갑자기 일어나다 머리 무게에 눌려 목뼈가 부러진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정조 때 다시 사대부의 처첩과 여염의 부녀는 가체는 물론 본머리에 다리를 보태는 것도 금지하고, 천한 신분의 여인은 머리를 얹는 것은 허용하되 다리를 드리거나 더 얹는 것을 금하는 내용의 금지령을 내렸으나 이루어지지 않다가 순조 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라지게 되었다고 하네여. 가체는 아마도 귀족의 상징, 즉 유럽에서 가발을 쓰는 이유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체는 사치품의 일종으로 조선 성종때에는 30cm 높이가 되었었고 조선 후기 가체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가체의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아 가격대가 엄청난 사치품이 되었고 최고 비싼 가체는 800냥에 달했습니다.
또한 가체는 필수 혼수용품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한도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좋은질문이시네요.^^
조선시대에 여성들은 블라우스와 치마로 구성된 '한복'이라는 의복을 입었습니다. 여성들은 치마를 고정하고 좀 더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번홀더 모양의 머리장식인 '가체'를 착용했습니다. 가체는 나무, 대나무, 금속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착용자의 사회적 지위와 경우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스타일링되었습니다. 가체는 조선시대 여성의 미와 세련미의 상징이 되면서 더욱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체의 착용은 조선 말 이후 쇠퇴하여 현재는 주로 특별한 행사나 역사적 재현의 일부로 착용합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