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예술가 알폰스 무하라는 화가는 어떤 인물인가요??
파리의 연극 포스터로 유명해졌다고 하는 알폰스 무하는 어떤 인물이고 작품에는 무엇이 있나요?? 그리고 미술계에 어떤 영향을 끼첬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폰스 무하는 파리에서 활동한 아르누보 양식의 선두자로 체코 출신의 화가, 삽화가, 장식 미술가입니다.
무하만의 독특한 양식과 장식적인 연극 포스터, 그리고 조국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기원하는 '슬라브 서사시'가 유명합니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지스몽다' 포스터(Poster for 'Gismonda', 1894년)
- '황도12궁': 달력 장식 패널(Zodiac : decorative panel, originally designed for a calendar, 1896년)
- 슬라브 서사시 연작 No. 1(The Slav Epic' cycle No.1 : The Slavs in Their Original Homeland)
- 슬라브 서사시 연작 No. 20(The Slav Epic' cycle No.20 : The Apotheosis of the Slavs, Slavs for Humanity)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하의 감각적인 화풍은 사회적 급변으로 인해 그의 말년에 지나치게 민족적인 구형 예술이라며 프라하 미술계에서 무시당했고 모더니즘 이후 아예 그 존재가 잊혀지기도 했으나 1960년대부터 무하의 작품이 재평가 받기 시작해 현대에 명성을 되찾았으며 현대에는 일반인에게 거부감이 심한 현대미술과 달리 취향을 덜 타는 편이라 인기가 많으며 기호화된 자연물과 인물의 형태는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작품으로는 툴루즈의 카산 주니어 인쇄소 벽보, 태양의 입술에 키스하는 인물 위로 올라가는 형상, 키스를 하는 커플, 백합을 든 여인, 지스몽다 포스터, 카말리아 포스터 등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폰스 무하 Alphonse Mucha(1860-1939)는 체코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장식 미술가이며 '무하 스타일' 또는 '르 스틸 뮈샤'라고 불리는 선형적이고 장식적인 문양과 미묘한 색감으로 그려낸 여성묘사 화풍은 '아르누보' 양식의 동의어로 여겨진다. 짧지만 찬란했던 '아르누보' 시대(1890-1910)의 정수로 평가되는 무하의 작품들 중 포스터, 패키지 디자인 그리고 장식 패널들은 실용적이고 상업적인 예술의 장르를 순수예술로 승화시켰다. 대표작으로는 지스몽다 Gismonda(1894), 사계 The Seasons(1900), 보석 The Precious Stones(1900)등이 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는 1860년 7월 24일 모라비아의 작은 마을인 이반치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법원 안내원이었으며, 어머니는 방앗간 집 딸이었다. 무하는 여섯 남매 중 넷째였다. 무하는 1878년 프라하의 미술학교에 지원했지만 불합격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880년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하여 극장을 위한 세트를 제작하는 회사의 풍경화 수습생이 되었다. 그러나 1881년 그가 다니던 회사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고 더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무하는 무라비아 남부에 있는 미쿨로프로 이동하여 초상화, 장식 미술 등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에두아르트 쿠엔 벨라시 백작(Eduard Khuen Belasi)는 무하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벨라시는 무하가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정식 교육을 받도록 지원했다. 뮌헨에서의 삶은 만족스러웠지만 외국인 제한이 심해졌고, 벨라시의 제안으로 1887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게 되었다. 1888년에 줄리앙 아카데미(Academie Julien)를, 1889년에는 콜라로시 아카데미(Académie Colarossi)를 다니며 다양하고 진보적인 스타일을 배웠다. 1889년 말 이후 벨라시의 후원을 더 받지 못하게 되었고 신문, 잡지, 소설 등의 삽화 제작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무하는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버그(August Strindberg, 1849~1912)와 친구가 되었다.
1894년 말, 파리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의 연극 포스터를 우연히 제작하게 되면서 극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높아진 무하의 명성은 미술계에서 성공으로 이어졌다. 일명 무하 양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르누보를 선보였고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무하는 조국을 위한 예술을 하기 위해 1910년 초 체코로 돌아와 '슬라브 서사시' 제작에 전념한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하게 되었지만 1938년 뮌헨 협정 체결로 독일 나치의 통제를 받게 된다. 1939년 무하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고 심문 후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많은 국민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알폰스 무하의 작품 활동은 사라 베르나르를 만난 이후부터 주목을 받는다. ''지스몽다' 연극 포스터'(1894)는 실물 크기 이상으로 컸는데, 높이가 2m가 넘는 비잔틴 귀족의 복장을 한 사라가 난초 머리 장식을 하고 서 있다.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그녀의 얼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화려한 무지개 모양의 아치이다. 이는 이후 제작된 무하의 모든 연극 포스터에서 인물의 후광 같은 역할을 한다. 운명적인 만남 이후 무하는 사라의 연극 포스터 전담 제작자가 되었다. 포스터 이외에도 사라를 위해 연극 프로그램, 세트, 의상, 보석 등을 직접 디자인했다. 이후 담배, 샴페인, 비스킷, 분유, 초콜릿, 맥주, 브랜디, 자전거 등 각종 홍보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장식 포스터는 곧 장식 패널로 발전했다.
첫 번째 시리즈는 1896년에 출판된 '사계'로, 계절을 대표하는 장식적인 꽃무늬를 가진 네 명의 여성들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무하는 '황도12궁': 달력 장식 패널을 제작하였다. 이는 12개의 별자리 기호로 둘러싸인 여자의 옆얼굴이 등장한다. 이러한 연작 패널과 달력 및 엽서와 같은 패널 작품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판매되었다. 대중을 매료시킨 무하의 명성은 상업시장 뿐만 아니라 순수 미술계에도 이어진다. 그는 1896년 살롱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하도록 초청받았고, 1897년에는 주요 회고전을 갖기도 하였다. 그의 전시회는 비엔나, 프라하, 뮌헨, 브뤼셀, 런던, 뉴욕 등 국제적으로 개최되었고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무하는 아르누보 양식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그는 그 이후 장식 미술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방면으로 작품 활동을 개진하였다. 민족성이 드러나는 벽화 작업뿐 아니라 장신구 및 실내 장식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1902년에 발간된 저서인 '장식 도큐멘트'는 장식 패널, 창문, 도자기, 가구, 귀금속, 포스터 등에 적용되는 예술적 장식에 필요한 지식을 널리 전파하고자 제작되었다. 이후 무하는 장식 미술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이 프로젝트가 바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슬라브 서사시 연작'이다. 이 프로젝트의 자금을 구하기 위해 무하는 뉴욕으로 향했고, 초상화 및 장식 미술 작품 활동과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부유한 사업가이자 자선가인 찰스 리처드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을 만나 후원을 받게 된다. 무하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작품 '슬라브 서사시 연작' 제작을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슬라브인들의 공로와 단결을 주제로 그려내어 애국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때 그는 지폐 및 우표 디자인, 국가 행사 포스터 제작 등도 하였다.
알폰스 무하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무하의 장식성이 풍부한 포스터와 패널화는 오늘날에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가 사망할 당시에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유려한 장식성으로 주목받지만, 슬라브 민족의 독립을 위한 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체코에서는 국민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 김달진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