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 가면 고인돌이 유명한데요. 그 유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어릴적 소풍장소로 고창 고인돌을 자주 간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나라 보물이지요. 하지만 그 유래에 대해 잘 몰라 부끄럽네요. 유래를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인돌은 죽은자의 무덤 위에 돌을 세워 그 사람의 권력을 나타냈던 하나의 장치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인돌은 계급 분화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 돌화살촉이나 간검돌, 민무늬 토기, 청동 제품 등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많은 고인돌에서 부장품이 출톧되지 않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이차장 또는 세골장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추측됩니다.
고인돌 이름을 논문에 처음 쓴 사람은 한흥수이며 , 한흥수는 일제강점기 때 유럽에 건너가 고고학을 전공한 우리나라 1세대 고고학자로 도유호, 손진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인돌을 연구한 학자입니다.
손진태는 민속학자, 한흥수와 도유호는 유럽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전문 학자인데 두 사람은 해방 뒤 월북해 북한 고고학을 이끈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한흥수는 1935년 조선의 거석문화 연구 논문에서 우리나라 거석문화를 선돌, 고인돌 , 칠성바위, 독무덤으로 나누어 분석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창 고인돌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방사선탄소 연대치를 근거로 하여 상한을 기원전 11세기나 9~8세기로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한에 대해서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으나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일부 지방에서 초기철기시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데여. 죽림리 고인돌에서도 원형 점토대 토기가 출토되어 고창 지방도 초기 철기 시대까지 고인돌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인돌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무덤으로 보지만 무덤방이 없는 것도 있으며, 단독의 대형 덮개돌을 한 것도 확인되고 있어 제단 고인돌, 묘표석 등으로 보기도 합나다. 고인돌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되어 많은 이설이 있다고 합니다.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 동원이 필요하므로 마을 공동체를 이루는 씨족단위 사회에서 정신적 구심점인 원시 신앙을 갖고 씨족 의례로써 고인돌을 축조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창 고인돌은 주로 북부와 동부의 산악 지대 산자락 아래에 집중 분포되어있는데 모두 8개 권역으로 나눠지는데 권역 간의 직선거리가 약 6㎞ 정도여서 당시 청동기인의 생활 영역이 반경 3㎞ 정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죽림리 일대의 고인돌은 약 2km 구간 내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음이 밝혀져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 지역 입니다. 상금리 고인돌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전라남도로 넘어가는 표고 225m의 가리재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주요 교통로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