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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 시기에 있었던 계축옥사는 어떠한 내용인가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잘 극복한 공으로 왕이 된 광해군는 왕이 된 이후에도 여러 가지로 어지러운 사정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계축옥사라는 옥사가 발생하여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개추국사는 어떠한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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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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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13년 대북파가 일으킨 옥사를 말합니다.

    대북파는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의 사사를 주도하고 소북파를 축출시켰다. 이후 영창대군 및 그 주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을 지속하였는데, 때마침 1613년 3월 문경의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이 거부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강변에서 당여를 맺었습니다. 그리고는 무륜당을 짓고 나무꾼·소금장수·노비추쇄인을 가탁해 전국에 출몰, 화적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을 저질렀다. 결국 이들은 피살자의 노복 춘상(이 뒤를 추적해 포도청에 고발하여 일망타진되었습니다.

    이 때 대북파의 이이첨과 그 심복 김개·김창후 등이 포도대장 한희길·정항 등과 모의,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꾸미고는 국문 과정에서 이들에게 거짓 자복하도록 교사하였고 이에 박응서가 비밀소를 올려 옥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계축년 1613년에 정인홍, 이이첨 등의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반란을 꾀했다는 구실로 반대파를 없애기 위해 벌인 옥사입니다.

    선조 말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갈등이 커졌으나 169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파가 조정의 실권을 쥐었습니다. 정인홍과 이이첨 등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을 탄핵해서 사사하였고 영창대군과 그의 생모인 인목대비 등을 몰아내려했습니다.

    1613년 3월 조정 대신의 서얼들인 박응서, 심우영, 서양갑, 박치의, 이경준, 박치인, 허홍인 등 7인이 문경의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 이이첨 등은 그들을 붙잡아 심문했고 그들에게서 영창대군을 옹립해 인목대비의 수렴청정을 돕기 위한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건을 저질렀다는 자백을 받아냈고 이를 구실로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폐하여 강화도에 유폐시켰다가 이듬해 살해했습니다.

    이후 신흠, 박동량, 한준겸 등 반대파 대신들을 조정에서 쫓아낸 뒤 정권을 장악하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이 사건은 이이첨 등이 박응서 등을 이용해 무고하여 일으킨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안경국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계축옥사(啓聳玉士)는 조선시대 광해군(在位: 1608년-1623년) 시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광해군이 자신의 부친인 인조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후, 인조를 배반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시도한 사건입니다.


    광해군은 인조의 죽음 이후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지만, 인조가 남긴 유언과 자기계발 정신에 반하는 행동을 하며 정치적인 무리한 변화와 사회적 불만을 샀습니다. 그 중에서도 계축옥사는 그 가운데 하나로, 광해군이 자신의 부친과 더불어 장기간 동안 업적을 쌓았던 문신들과 학자들을 면직시키고, 그 자리를 자기 가족과 좇는 사람들로 채우는 일입니다. 이로써 광해군은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강화하고, 자신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요소들을 배제하고자 했습니다.


    계축옥사는 조선시대에서 정치적인 탄압과 인사 재편, 권력 강화를 위한 대목으로 알려져 있으며, 광해군의 통치 방식과 권력 남용에 대한 비판과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중기 1613년 (광해군 5) 대북파 (大北派)가 영창대군 (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 입니다. 계축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계축옥사라 하며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인조반정 (仁祖反正)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계축년(癸丑年)인 1613년(광해군 5)에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는 반란을 꾀했다는 구실로 반대파를 없애기 위해 벌인 옥사이다. '계축사화(癸丑士禍)' 혹은 '계축화옥(癸丑禍獄)'이라고도 하며, 이른바 '칠서(七庶)의 변'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해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고도 한다.


    선조 말기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갈등이 커졌으나,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파가 조정의 실권을 쥐었다. 정인홍과 이이첨 등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小北派)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해서 사사(賜死)하였고, 영창대군과 그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 등을 몰아내려 하였다.


    1613년 3월 조정 대신의 서얼들인 박응서(朴應犀), 심우영(沈友英), 서양갑(徐洋甲), 박치의(朴致毅), 이경준(李耕俊), 박치인(朴致仁), 허홍인(許弘仁) 등 7인이 문경의 새재[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이첨 등은 그들을 붙잡아 심문하였고, 그들에게서 영창대군을 옹립해 인목대비의 수렴청정을 돕기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건을 저질렀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또한 이를 구실로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폐하여 강화도에 유폐시켰다가 이듬해 살해했다. 이후 신흠(申欽), 박동량(朴東亮), 한준겸(韓浚謙) 등 반대파 대신들을 조정에서 쫓아낸 뒤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이 사건은 이이첨 등이 박응서 등을 이용해 무고하여 일으킨 것으로 규정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대북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역모하였다는 이유로 소북의 영수(領首) 류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소북 인사들을 축출한 사건으로 대북은 또 계속

    왕권에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때마침

    그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 사건이

    계축옥사(癸丑獄事)이다.

    출처: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계축옥사는 1613년(광해군 5) 봄 재물을 노리고 살인죄를 저지른 박응서(朴應犀)를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등이 유혹하여 면죄의 댓가로 거짓 역모를 고발하게 하여, 영창대군과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비호하던 세력을 조정에서 제거한 사건이다. 영창대군은 1614년(광해군 6) 2월 9살의 나이로 강화부사 정항(鄭沆)에게 살해당하였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는 사건의 여파로 1618년(광해군 10) 서궁에 유폐되었다. 박응서 등 일곱명의 서자(庶子)가 관련된 사건이라고 해서 ‘칠서지옥(七庶之獄)’으로 불리거나, 주모자로 지목된 서양갑(徐羊甲)의 이름을 따서 ‘서양갑의 옥사[徐獄]’, 고변자의 이름을 붙여서 ‘박응서의 옥사’라고도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