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질문

2023. 01. 05. 13:49

윈스턴 처칠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궁금합니다. 영국의 위대한 수상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구체적인 업적에 대해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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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회사 7년 근무(디자이너,모션그래퍼)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국의 정치가. 옥스퍼드셔 출생. 1895년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4경기병 연대에 입대, 인도로 배속되었는데 특별허가를 얻어 쿠바반란 진압작전에 참가하였다. 1898년 수단원정, 1899년 보어전쟁에 참가하여 종군기사를 발표하였다. 보어전쟁에서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국민영웅이 되었다. 1900년 보수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보호관세정책에 반대하여 1904년 자유당으로 옮겼다. 1906년 이후 자유당 내각의 통상장관·식민장관·해군장관을 역임하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 중 다르다넬스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1915년 해군장관 자리를 물러났다.

1917년 군수장관으로 재입각, 1919년 육군장관 겸 공군장관, 1921년 식민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자유당은 분열하여 쇠퇴의 길을 걸었고, 소련에 대한 강한 반감과 열기를 더해가는 노동운동에 대한 위기심에서 보수당에 복귀하였다. 1924년 보수당 볼드윈 내각의 재무장관이 되어 자유무역주의를 주장하고 영국의 파운드화를 금본위제로 복귀시켰다. 1926년 총파업 때 강경한 탄압정책을 주장하여 노동운동가들로부터 적대시되었다. 1929년 내각총사퇴 후 10년간은 보수당 주류파와 견해를 달리 하였던 탓으로 1931년 거국내각에도 1935년 보수당 내각에도 입각하지 않고 각외에 머물러 있었다.

보수당 주류파와의 차이점은 당시의 국책이었던 인도자치론에 반대한 것과 대독일강경론을 주장하여 주류파의 유화정책에 반대한 것이었다. 보수당 주류파는 파시즘을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로 여겨 유화정책을 주장한 반면, 처칠은 나치독일의 군사력이 영국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군비낙후를 규탄하고 영국·프랑스·소련동맹을 제창하였다. 소련과도 동맹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의 반소주의가 영국의 안전보장이라는 지상명령에 자리를 양보한 결과였다. 이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인정되기 시작하여, 1940년 노르웨이작전 실패를 계기로 보수당은 총리 체임벌린 대신 그의 지도를 요망하여 총리에 취임하였고, 전시중에는 노동당과의 연립내각을 이끌고 루스벨트, 스탈린과 더불어 전쟁의 최고정책을 지도하였다.

1945년 총선패배 후에는 야당당수로서 집권노동당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고, 냉전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반소진영의 선두에 섰으며, 1946년 미국 미주리주 풀턴 연설에서 '철의 장막'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1951년 총리에 재취임하고 경(Sir) 칭호를 받았다. 1955년 당수직을 이든에게 물려주고 평의원으로 하원에 머물러 있었다. 역사·전기 등 산문에 뛰어나 《랜돌프 처칠경》(1906) 《말버러:생애와 시대》(4권, 1933∼1938) 《제2차 세계대전》(6권, 1948∼1954) 《영어사용국민의 역사》(4권, 1956~1958)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953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화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2023. 01. 0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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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BBC는 2002년 ‘가장 위대한 영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영국과 영국인. 수많은 위인들이 후보에 올랐지요. 인도와 바꿀 수 없다는 대문호 셰익스피어, 물리학의 천재 뉴튼, 진화론으로 인류의 뿌리를 밝혀낸 다윈, 위대한 대영제국을 건설한 엘리자베스 1세, 세계 해전사를 새로 쓴 넬슨 제독 등등. 이렇게 만만치 않은 후보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인물은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입니다.1939년, 드디어 인류 최대의 비극인 제2차 대전이 시작됐을때 . 영국은 당황했습니다.. 내각은 총사퇴를 하고 새로운 전시 내각이 꾸며졌습니다. 그 내각의 총리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처칠이었습니다 이때가 1940년으로 처칠의 나이 65세 때입니다.히틀러는 처칠에게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제안했습니다. 평화를 원하는 파와 전쟁을 원하는 파, 양측의 대립과 반목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처칠은 1940년 5월10일, 영국의회에서 연설을 시작했는데요. 역사적인 연설 이후 영국민은 단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처칠은 몸소 이 단결된 힘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의 최전선에 나섰다고 합니다. 우선 영국왕실과 정부요인을 외국으로 피신시키려는 계획을 파기했고 그리고 대영 제국박물관의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캐나다로 옮기려는 계획도 백지화 시켰다고 합니다.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독일의 공습에 노출된 것이다. 그것은 영국민에게 용기와 단결된 힘을 모아주었다고 합니다.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평양, 신의주로 피신을 간 선조 임금과는 비교되는 장면 이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그를 영국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023. 01. 0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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