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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09

조선 말기에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인 수신사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에 통신사라는 외교사절이 일본에 파견이 되었다가 조선 말기에는 수신사가 외교사절로 일본에 파견이 되었다고 하는데 수신사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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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2.09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수신사(修信使)는 고종 때 1876년

    이후 조선에서 일본 제국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체결 이전까지의 〈조선 통신사〉에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바뀌면서 〈수신사〉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통신사’가 조선이 문물을 주는 입장이었다면, ‘수신사’는 조선이

    문물을 받는 입장을 고려한 이름이다. 1876년부터 1882년까지 3차에

    걸쳐서 파견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신사(修信使)는 고종 때 1876년 이후 조선에서 일본 제국에 파견한 외교사절 입니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체결 이전까지의 〈조선 통신사〉에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바뀌면서 〈수신사〉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하지요. ‘통신사’가 조선이 문물을 주는 입장이었다면, ‘수신사’는 조선이 문물을 받는 입장을 고려한 이름입니다. 일본이 강화도조약에 사절을 파견한 것에 대한 회사(回謝)와 메이지유신 이후 변화된 일본의 정세와 개화 상태를 살피는 임무였다고 하지요. 1차 수신사 김기수 일행은 4월 29일 부산포를 떠나 5월 7일 동경에 도착하였으며, 원료관(遠遼館)에 20여 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5월 27일에 동경을 출발해서 윤5월 7일에 부산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1차 수신사는 조일수호조교 체결 후 구로다 기요타카 사절이 조선정부에 사절 파견을 요청함으로 두 나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일본의 국정을 탐색하기 위해 예조참의 김기수를 수신사로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예정에도 없던 일본 왕과 만나고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와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정계 요로로부터 연회에 초대받았고, 일본 정부는 근대화 성과를 모두 과시하려 하나 일정의 촉박함과 일본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 등의 이유로 일본 정부가 보여주려고 계획한 시설의 1/6정도만 선택적으로 시찰하였습니다.

    위정척사 사상이 만연한 당시의 분위기에서 김기수의 사행은 곧바로 조정의 개화정책실현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지만, 메이지 초기 일본의 실태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2차 수신사는 1차 수신사가 귀국 후 1876년 8월 조선과 일본 사이에 통상장정이 체결되었고 미곡 수출과 무관세 무역을 허용한 이 장정에 따라 막대한 양의 미곡이 유출되어 통상장정을 개정하여 관세를 설정하는 것이 과제로 일본정부는 1879년부터 인천 개항을 강요하고 조선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협상하고 일본 정부의 진의와 실정을 탐색하기 위해 1880년 수신사로 김홍집을 일본에 파견합니다.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1880년 5월 28일 사폐한 후 6월 26일 일본 기선 센자이마루편으로 부산을 출발하고 7월6일 도쿄에 도착 후 1개월동안 체류하다 8월 4일 귀로에 올라 8월 28일 복명하였습니다.

    김홍집 수신사는 도쿄에 체류하면서 외무성을 예방하는 등 정계를 비롯해 교육계, 재계 등 각 방면의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며 친분을 나누고 일행 역시 각각 일본 정부의 각 기관과 시설을 견학하여 일본의 발전상과 세계 정세의 동향을 살피고 강력한 개화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김홍집은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과의 회담에서 미곡의 금수를 요청하지만 이노우네는 조선 수출품의 대종이 미곡이라는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고, 개항문제에서도 인천을 개항하는 대신 그 대안으로 남양만의 마산포를 제시하지만 적극적으로 고려하지않았습니다.

    2차 수신사 파견의 공식적 목적인 관세 설정 문제에서도 전권위임장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 측은 협상하지 않았고, 김홍집은 관세를 지방관과 영사가 협의해서 결정한다고 생각하여 전권위임과 초안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통상장정의 초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홍집 수신사는 주일 청국 공사 하루장, 참찬관 황쭌셴 등으로부터 일본이 구미와 조약을 개정하려 한다는 정보와 관세의 결정은 본국이 주가 되어 결정한다는 관세 자주권 개념을 파악하고, 황쭌셴은 조선책략을 지어 김홍집이 귀국할 때 전해주는데 이는 위정척사파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하지만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조사시찰단의 파견과 미국과의 수교방침 수립등 고종의 개화정책 추진에 활용되었습니다.

    3차 수신사는 일본의 국서 봉정에 대한 답방으로 조선의 국서를 봉정하고 현안인 관세 설정을 확정하기 위해 파견한 사절입니다.

    조병호 수신사는 9월18일 국서를 봉정한 후 9월 27일 부터 10월 21일까지 모두 6회의 세칙 담판을 전개하였지만 일본측은 일반상품의 관세 10%가 고율이란 이유로 지연책을 쓰면서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습니다.

    조병호 수신사는 이 교섭과정에서 청국 공사 허루장으로부터, 당시로서는 고율인 이 관세율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이듬해 영일조약의 개정을 기다리거나, 먼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근거로 세칙을 정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조언을 듣고 교섭을 중단하는 전략을 택합니다.

    이전의 수신사과 같이 일본의 군사, 산업, 교육, 문화시설을 시찰하고 신문사를 방문하여 신문 발간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데리고 온 장대용과 신복모는 육군 도야마학교에서 하사관 수업을 , 이은돌은 교도단에서 나팔술 수업을 받습니다.

    4차 수신사는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제 4차 수신사의 공식명칭은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 입니다.

    임오군란 이후 제물포조약과 조일수호조규속약이 체결되었는데 속약을 비준하는 권한이 부여되어 특명전권대신을 칭한것으로 제물포조약에서 일본인 사상자 위로금으로 5만엔, 군대 파견에 따른 보상금인 전보금 50만엔을 지급하기로 규정하였는데 이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 것도 수신사의 임무였습니다.

    9월8일 국서를 봉정하고 16일에 이노우에와 협상을 통해 제물포조약에서 5년간 10만엔씩 지불하기로 한 임오군란 전보금을 10년간 5만엔씩 지불하기로 하고 수신사는 은화가 아니라 당시 약 30%정도 인플레이션이 된 지폐로 지급하겠다고 협상하나 이노우에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기한을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해준것입니다.

    당장 지급해야 되는 사상자 위로금 5만엔은 요코하마 정금은행에서 빌려 해결했습니다.

    박영효 수신사는 스스로 조선의 공사를 자처하면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숙소과 연회장에 국기를 게양하고

    9월 26일 왕비 성절에는 엔료칸에서 일본 대신들과 주일 각국 공사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개최했습니다.

    파크스 주일 영국 공사에게는 조영조약의 조속한 비준을 촉구하고 조선과 조약 체결을 요청한 트리쿠 주일 프랑스 공사에게는 전교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면 조약을 체결할수있는 점을 시사했습니다.